호남기록문화유산(8) 만귀정
호남기록문화유산(8) 만귀정
  • 서성우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6.03.1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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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사를 꿈꾸며 세운 만귀정(晩歸亭)

광주에서 송정리가는 광주・송정간 도로 극락교 교차로에서 서창방면으로 좌회전하여 순환도로 옆길로 가면 하동마을이 나오는데, 그곳에는 만귀정이라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이 정자는 흥성 장씨인 효우공 장창우가 낙남(落南)하여 후학을 가르쳤던 옛 터에 그의 후손인 장안섭을 비롯한 여러 후손이 그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만귀정의 모습
▲만귀정의 현판들

당시 장창우가 낙남하면서 지은 만귀정은 초정(草亭)의 형태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창건 시기를 약 1750년경으로 보기도 한다. 세월의 풍파로 인해 훼손되어 1934년에 와서 후손들에 의해 중건 되었으며, 1945년에 중수되어 지금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이에 대한 기록은 1934년 고광선(高光善)이 쓴 중건기, 같은 해 이병수(李炳壽)의 중건상량문, 1945년 후손인 묵암 장안섭의 중수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만귀정 이외에도 습향각과 묵암정사 등이 다리를 사이에 두고 한 줄로 나란히 위치해 있어 독특하면서도 운치를 더한다. 봄이면 벚꽃, 여름이면 연꽃, 가을엔 꽃무릇, 겨울엔 소나무위의 눈꽃 등이 피어 사계절 꽃을 볼 수 있어 서구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꼽힌다.
 
▲취석과 성석
▲ 만귀정과 습향각, 그리고 묵암정사

 

만귀정 근처에는 마치 제단과 같은 널찍한 암석이 있어 눈길을 끈다. 습향각으로 향하는 길에 한쪽에는 ‘취석(醉石)’, 다른 반대쪽에는 ‘성석(醒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암석이 바로 그것이다. 말 그대로 들어갈 때는 술에 취해 있더라도, 나올 때는 술이 깨서 나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여 재미를 더한다. 또한 이것은 “고향집 정원에 있는 큰 바위에 앉아서 술잔을 들고 취해서 그 자리에 팔을 베개 삼아 누어서 잠들고 하는 청빈(淸貧)과 안서(安舒) 속에 나날을 보낸 도연명의 옛 일을 본받고자 당시 묵암 장안섭이 이름하여 설치한 것”이라고 전한다. 참고로 도연명은 기개 높은 학자로서 나이 41세가 되던 해에 진나라 심양도 팽택이라는 고을의 현령이 되었는데, 그 고을 군의 신임장관이 큰절로 인사를 강권하자, “내 어찌 봉급 때문에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히고 절을 하겠는가?” 하고 그 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는 일화가 있는데, 그 때 지은 작품이 유명한 <귀거래사>이다.

▲일제강점기에 결성된 시회, 만귀정시사
 
당시 만귀정에서는 멋스러움을 한시로 읊으며 세상을 논하는 시회가 결성되었다. 1939년 송광세(宋光世)가 지은 <만귀정시사창립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거기의 내용을 통해 1939년경 ‘만귀정시사(晩歸亭詩社)’라는 시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귀정은 현재 광주광역시 문화재 자료 5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당시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인해 당시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서로의 흥취를 돋았던 장소였던 것이다. 다음은 비문에 새겨진 내용의 일부이다.
 
▲ 만귀정시사창립기념비 전후 모습
 
“서석 서쪽에 만귀정이란 정자가 있다. 산과 물이 맑고 고우며 숲과 골짜기가 깊고 그윽한 곳으로 옛날 효우당(孝友堂) 장공(張公)이 노닐던 곳이다. 이 옛터에 정자(亭子)를 다시 일으킨 후손이 있으니 상열, 대섭, 안섭, 김정섭, 창섭 등이다. 지난해 가을에 박창환이 이 정자로부터 돌아와 나에게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설명하면서 결사(結社)의 뜻을 비치었다. 당시 시를 좋아 하던 선비로 박장주(朴璋柱), 이회춘(李會春), 김병권(金炳權), 박하형(朴夏炯), 조병희(趙秉熙), 이석휴(李奭休) 등이 있었다. 원근의 제현들과 상의하여 봄철에 한번 정도 시를 읊고 노니는 계획을 마련하니 이 시사의 조건일 뿐이다. 진나라의 난정(蘭亭)과 당나라의 향산(香山)을 방불케 하니, 그 사이 장씨의 제현들이 특별히 누정 앞에 비를 세워 기록하여, 이 시회의 전말을 후인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자 한다.”(중략)
 
위의 내용을 통해서 일제 강점기인 1939년경에 시사가 어떤 취지로 결성되었는지, 또 구성원이 누구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일제강점기에 결성되어 활동한 시사임은 확실한 셈인데, 과연 당시 모임의 분위기가 어떠했을지 궁금해진다. 시기적으로 검열과 감시가 삼엄했을 것인데, 누가, 얼마나 그 울분을 한시로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처한 신분에 따라 자신들의 여유로움만을 즐기고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암흑과 같던 일제 식민지시기를 오히려 즐겼던 부류도 없진 않았을 것이기에 많은 상상이 요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또한 특수한 상황에 해당하는 하나의 문학 활동의 한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없진 않아 고민을 보탠다.
 
이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만귀정 시사에 참여한 여러 인물과 작품들을 검토해보는 일이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당시의 다른 지역의 시사와는 달리 별도로 편찬한 시집이 없어 많은 다양한 작품을 살펴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다행히 후손에 의해 광주지역의 지방지와 개인문집 등에 흩어져 있는 몇몇 작품들을 모아 놓은 것이 있어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으나, 더 많은 작품이 있을 것으로 보여 계속적인 발굴 작업이 요구된다.
 
필자는 만귀정시사와 같이 20세기 호남지역 곳곳에서 결성된 시사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 이 시사들에 대한 연구들이 당시의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수집된 작품 중 몇 작품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을 맺을까 한다.
 
만귀정원운 晩歸亭原韻 - 장안섭(張安燮)
 
아둔하고 어리석어 현명치 못한 이내 몸 鈍質癡心體不明
두어 서까래 초가집에 한 평생 늙어가리 數椽茅屋老生平
찬 강 비 오는데 어부의 피리소리 들리고 一區漁笛寒江雨
산 중턱 초동의 노래 예스런 달빛 맑구나 半嶺樵歌古月晴
산을 본래 좋아할 뿐 속세 피한 게 아닌데 性本愛山非避世
들만 애써 가는 중에 공명심도 벗어났구려 力能耕野可逃名
이 땅 거닐어 보니 왜 그리 뒤늦게 왔는지 盤桓此地歸何晩
자식 교육에 순탄한 집안이 내 심정이라네 敎子齊家是我情
 
봄은 늙지 않아 春不老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사방 녹음이 눈앞에 비끼는데 四面綠陰眼界斜
두어 집 짙은 향기 기운도 좋구나 濃薰佳氣數三家
나물 캐는 소녀여 이 봄 꽃 비녀에 여전하고 菜女花簪春不老
목동의 풀피리라 그 소리 끝 간 데 없구나 牧兒萊笛渺無涯
때마침 제비 소리 높은 들보에 싱그러운데 梁高時適新燕語
울창한 숲 깃들 줄 아는꾀꼬리 노래까지 樹密止知黃鳥歌
고개를 돌려 다시 봐도 모두 다 좋으니 回首更看盡相好
섬돌 앞 방초도 짜 놓은 비단만 같구나 階前芳草織如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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