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하 그리고 희망가(1)
태평천하 그리고 희망가(1)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6.03.17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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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가 태평하니 희망을 노래합시다”

▲ 이홍길 고문
뒤틀린 세상 따라 뒤틀리다 보니 별별 요망한 생각이 난무한다. 그래도 함께 고민할 여러분들이 있기에 요망 떠는 틈틈이 진실의 요망군이 되어 볼 생각이다.

깊이 궁리를 잘하는 것을 궁통이라 말하는 수도 있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말은 본디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는 것을 줄인 말로 개혁 정당화의 논리로 중국 청말의 개혁운동 시에 회자되었던 것이다. 정치가 궁하고 경제가 궁하고 민생이 곤궁해지면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은 당연한 순서이자 논리가 되겠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그 생존을 위해서 기왕의 시스템과 방향을 변화시킴으로써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된다. 3선 개헌으로 부패한 독재 권력을 연장코자 했던 자유당정권과 맞서 싸웠던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도 같은 맥락이었고, 이대로는 기왕의 양당체제가 민주화를 고사시킨다는 발상으로 새로운 정치세력을 도모했던 국민회의도 같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인간집단이 그 이해관계와 정치욕망을 배합하여 조성하는 것으로 변화가 아무리 절박하더라도 대체적 조건을 넘어서기는 어렵다. 기성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세력은 변화를 요구하는 세력을 견제하거나 압도하여 변화를 차단한다. 아울러 갖가지 논리와 사례를 동원하여 현실을 분식하고 미화한다. 사드의 위험을 경고하고 양극화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5포시대, 7포시대의 안타까움을 젊은 세대들의 미래를 곁들여 통사정해도, 기성세대들에 의해 장악된 현실은 기득권 방어를 위한 총화단결로 더욱 강고한 결집력을 자랑할 따름이다.

주도권이 심각하게 동요하거나 위협받을 때만 그들은 퇴각하고 양보한다. 6·29선언이 그 실례다. 비록 다수이고 변화의 정당성을 가졌을지라도 현실을 타파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이솝우화의 신포도 이야기로 변혁을 포기하거나 반어적 풍자로 감성만족에 머무르기 십상이다.

이야기를 끌어가다 보니 비관정서가 쪼속쪼속 올라와 패배감이 가슴 밑바닥을 후빈다. 그러나 패배의 쓴잔을 아직 마실 필요는 없다. 도구 또는 무기는 가치중립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단이다. 홍범도 장군은 그의 게릴라투쟁 시에 적의 무기를 빼앗아 사용한 것으로 유명했다. 사용하는 목적과 방법은 사용자가 결정하는 것임으로 태평천하의 희망을 아직 버리지는 말자. 문자로서 태평천하는 모든 인간들이 소망하는 대동의 낙원이다.

기득권자들의 희망은 기득권의 보호와 창달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진영의 대척점에 억압 받았던 민중이 상시 존재했던 것이다. 민중의 희망은 억압과 착취가 없거나 없어지는 것으로 기득권자들의 그것에 비해 훨씬 열려 있는 것이다. 20세기, 21세기가 그 전망으로 보여주고 제시한 것으로 민주정권, 인민정권의 실질을 구현하면 되는 것이고 직접민주, 간접민주의 모든 인간의 행복과 복지에 도움 되는 방법을 구성원들이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민중의 희망은 끊임없이 유린되어 왔다. 기득권자들에 의해서 유린당하고 민중 안에서 신생하는 기득권세력에 의해서 기만당하면서 보내온 세월이 전 역사에 궁할 때, 삶과 역사에 의해서 배신당한 느낌으로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하고 자문해 보지만, 기득권자에 근접해가는 느낌 말고는 아무래도 양이 차지 않는다. 억압과 착취를 극복코자 했던 희망이 겨우 억압자, 착취자에 근접해 가는 것이라면 그 시시함에 자괴감을 떨칠 수 없다.

노금노가 지은 ‘땅의 아들’이 전한 바에 의하면, 1980년 미국문화원을 방화한 사람들은 법정에서 자신들의 행위는 “민족자존을 지키고 되찾고자 실행한 정당한 행동이며 이 시대 민중들의 미국에 대한 분노의 표시를 행동으로 대변코자 광주 미문화원에 불을 질렀다”고 주장했다. 그 중 한 사람인 농민운동가 박시영은 사건 직후 경찰에 검거되기 몇 시간 전에 그의 심정을 희망가의 곡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불렀다.

“비바람 몰아쳐 벼꽃이 지니 옛날 생각을 하였더라. 한 번에 찢으려던 깃발이 무섭구나. 내 손 흔들고 내 발 뛰어서 새 세상 이루어 보렸더니 희망찬 세상은 들판 가득 또 다시 안개로다”

박시영처럼 적어도 기득권자들에 근접코자 하지 않았던 민중들은 아직 요원의 불씨처럼 세상 도처에 내연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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