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렌日記’로 본 미국의 대한정책 변화
‘알렌日記’로 본 미국의 대한정책 변화
  •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
  • 승인 2016.03.09 19: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 거울삼아 미·일동맹과 미·중 거래,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자”
▲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

구년(舊年) 묵은 이야기를 꺼내서 어쩌자는 거냐고 핀잔을 주실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으나 최근 한반도의 하늘에 감도는 이상기류 현상을 보면서 왠지 가슴이 아리고 슬픈 생각이 들어 감히 붓을 들게 되었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면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때로 뒤를 돌아보도록 강요한다. 역사가의 눈으로 본다면 우리가 겪은 수난의 시대 모별의 삶은 우리 스스로가 자초한 것 일수도 있다. 보수정권 8년 현 시국의 위기 상황은 저들의 경륜과 투철한 민족 역사의식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이 미국이 한·일 양측에 압박을 가하여 이루어낸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위안부’ 합의가 단적인 예이다. 한 인간의 삶을 철저하게 파멸시킨 반인륜적 범죄를 속죄하기 보다는 외교적 흥정거리로 삼다니 그게 어디 인간의 탈을 쓴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다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애국이든 뭣이든 겨레의 안위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입장에서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 보려고 한다. 일제강점기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외치며 왜놈들의 앞잡이 노릇이나 하던 자들과는 달리, 전시 일군(日軍)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가담했던 한 역사가는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자. 모든 현상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눈으로 바라보고 역사적인 시각에 의해서 비로소 살아 있는 의미를 띠게 된다”고 말했다.

알렌, 美 北장로교 의료선교사
21년간 한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

알렌(Horace N. Allen)은 1884년 9월 미 北장로교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온 뒤 주한미국공사관의 서기관 대리공사, 전권공사를 거쳐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국권이 피탈된 뒤 귀국할 때까지 21년간 한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그는 처음 중국에 파견되었으나 그곳 선교사업에 적응하지 못하고 환멸감을 느끼다가 마침내 장로교 선교본부에 조선행을 자청, 내한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병인양요(1866) 이래 척사윤음(斥邪綸音)으로 포교가 금지되어 있는 상태여서 초대 주한미국 특명 전권공사 푸트(Luicus H. Foote)는 대단히 난감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는데 마침내 기지를 발휘하여 신분을 감추고 알렌을 ‘미국공사관 무급의사(Physician to the Legation with No Pay)’로 임명한다. 그러한 사연을 뒷날 알렌은 조선행 결행 후 “나는 계략(計略)을 써서 조선에 잠입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잠입’이란 표현은 그의 본심을 가장 잘 드러낸 말인 것 같다.

알렌이 조선 국왕의 신임을 얻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김옥균 일당이 일본을 등에 업고 일으킨 갑신정변 때 왕비의 친정 조카인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하면서 부터다. 민영익은 칼을 맞고 뱃가죽이 찢어지는 등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다행히 외상일 뿐 경정맥이 잘리거나 호흡기관이 절단된 것은 아니어서 외과의사인 알렌이 명주실로 봉합 수술 끝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그 일이 있고난 뒤 왕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획득,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활동의 폭을 넓혔다.

조선정부는 알렌의 병원 설치안을 받아들여 1885년 4월 3일(음 2월 18일)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원인 광혜원을 개원하였다. 광혜원 자리는 갑신정변 때 참살된 북부 제동 홍영식의 집이었다. 참으로 기막힌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척박한 땅에서 막 자라던 새싹이 잘려나간 자리가 또 다른 문명 침략의 거점이 되다니! 민영익 암살미수 사건으로 말미암아 친정(親淸)파 6명이 살해되었는데 주한일본공사 다께조에(竹添進一郞) 일당과 한패가 된 주동자들이 대궐을 범(犯)하였다. 청군의 개입으로 김옥균 일파는 일본 상선 찌도세마루(千歲丸)를 타고 제물포를 거쳐 일본으로 도망쳤다. 그가 살던 이태리식 가구로 치장한 호화저택도 이때 불타 사라져버렸다.

알렌문서, 개화기 한미교섭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

알렌이 외교관으로 체류하는 동안에 기록해 놓은 ‘알렌문서’(The Horace-Newton Allen Manuscript Collection)가 뉴욕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는 개화기 한미교섭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중 <알렌일기>에서 한말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을 지켜보면서 미국이 어떤 대응을 취했으며, 한반도에 미친 영향은 또 어떠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1876년 개항 이후부터 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청·러·일 등 제국주의 열강은 한반도 지배권 장악을 위해 상호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 열강은 번갈아 가면서 대한 지배권을 행사해 왔다. 알렌의 대한정책은 한반도 지배권의 실체가 바뀔 때마다 상응한 조취를 취했다.

이와 같이 정책 변화를 일으킨 데는 두 가지 기본 원칙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 자국의 국가이익 수호이다. 어느 한 나라가 득세하면 자국의 이익이 손상될 수 있으므로 지배세력을 견제하고 반대세력을 보이지 않게 지원하게 된다. 둘째, 조미조약(朝美條約) 제1조에 명문화 되어 있는 거중조정(居中調整, Good offices) 조항을 성실히 준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주재국을 보호한다는 입장이다.

열강의 한국 지배기(1884. 12. 4.~1905.)는 다음 4기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첫째, 청(淸)의 지배기(1884. 12. 4.~1894. 7. 25.) - 갑신정변 발발부터 청일전쟁 발발까지
둘째, 일본 지배기(1894. 07. 25.~1896. 2. 11.) - 청일전쟁 이후부터 아관파천까지
셋째, 러시아 지배기(1896. 2. 11.~1898. 4. 12.) - 아관파천부터 러시아 철수까지
넷째, 일본의 지배기(1898. 4. 12.~1905.) - 러시아 철수부터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전승 이후까지

1. 청의 지배기

이 시기를 살펴보면 조미(朝美) 교섭의 최대 쟁점은 속방(屬邦)문제였다. 청나라 이홍장은 조미조약문에 “조선은 본래부터 중국의 속국이다.”라는 조항을 명문화 할 것을 주장했으나 슈펠트(Robert W. Shufeldt, 1882년 5월 22일 조미조약 체결을 성사시킨 미국의 해군 제독)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주권국가로서 조선의 위상을 확고히 다짐받아 놓으려고 했다. 이로써 조선은 국제법상 완전 자주독립국가임을 공인받게 되었다. 그러나 1882년 5월 22일 조미조약 체결 당시 조선대표 신헌(申櫶)과 김홍집(金弘集)이 ‘조선국왕 속방조회문’을 작성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도록 슈펠트에게 수교하였는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에 의하면 “조선은 본래부터 중국의 속방이지만 내치외교(內治外交)는 대조선국 군주가 자주(自主)한다.”라고 속방 지위를 자인하는 표현을 써버렸다. 아마도 골수에 박힌 사대적 발상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성호나 연암까지도 압록강 이북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고 하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대한종주권 주장(Claim to the Overlordship of Korea)은 한층 힘을 받게 되었다. 청말 직예총독(直隸總督) 이홍장이 보낸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총독 행세를 하면서 갖은 횡포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정치적 작태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갑신정변(1884. 12. 4)은 청으로 하여금 대한지배권 확립에 결정적 전기를 마련해 준 사건이다. 임오군란 때 패퇴한 경험을 갖고 있는 일본은 급진개화파를 앞세워 친청사대당을 제거하고 친일내각을 만들어 대한지배권을 확립하고자 쿠데타를 지원했는데 청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청의 지배 기간 동안 앞서 언급한 ‘종주권’은 대한내정간섭의 구실이 되었고 우리에게 큰 낭패감을 안겨주었다. 이에 미국은 반청(反淸) 깃발을 높이 든다. 이러한 미국의 반청사상은 일본으로서는 백만 원군을 얻는 것 못지않게 큰 힘이 되었다. 청·러·일 3국이 각축함으로 말미암아 한국은 사실상 아시아 ‘폭풍우의 중심지’(Storm Center)가 되고 말았다.

이러하여 알렌은 일본이 주장해 온 ‘조선의 절대적 독립’을 지지함과 동시에 반청친일(反淸親日)정책으로 국면 전환을 꾀함으로써 조선 정국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청나라 위안스카이의 조선군림은 결국 일본으로 하여금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로의 발전요인이 되었고, 나아가서는 청일전쟁 발발 원인(遠因)이 된 것이다. 따라서 알렌의 반청, 친일사상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 심각한 정신적 영향을 줬다.

2. 일본 지배기

1894년 7월에 일어난 청일전쟁은 일본의 압승으로 끝났고, 따라서 일본은 한반도 지배의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일본의 침략위협에 직면한 조선왕실의 불안은 날로 커졌고, 이에 대응하고자 하는 전략이 제3세력인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고자 했는데 그 중심에 민비가 있었다.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원천적으로 거세하고자 은밀히 민비암살 음모를 꾸몄다. 당시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는 조선왕실의 불안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조선왕실에 대한 반역행위가 있을 경우에는 일본정부는 무력을 써서라도 기필코 왕실을 보호할 것입니다”라고 언명한 바 있었다. 민비는 알렌에게 이 말의 진위를 알아보려고 자문을 구했었다. 알렌은 “일본이 세력을 잡고 있는 한 왕비와 왕세자는 폭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조선왕실을 보호하겠다던 이노우에가 교체되고 1895년 9월 1일 가장 호전적인 육군 중장 미우라(三浦梧樓)가 주한일본공사로 부임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미우라가 오자마자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일본인이 지휘하고 있던 훈련대를 조만간 해산할 거’라는, 이 소문은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禹範善)에 의해 미우라에게 전해졌다. 이에 미우라는 훈련대 해산 전에 일을 저지를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미우라가 부임한지 불과 한 달 만인 10월 8일에 한나라의 왕비를 죽이는 천하에 몹쓸 짓을 감행하였다. 가히 발악적인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우라는 깡패집단인 장사패를 거느리고 경복궁에 치고 들어가 민비와 궁 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 시위대 연대장 홍개훈, 그리고 궁녀 3명 등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만약 알렌이 이노우에 공사의 조선왕실 보호를 믿지 말라고 진언했더라면, 민비는 1882년 임오군란 때처럼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도 있었었을 것이다. 결국 알렌과 이노우에는 민비 시해를 도와준 꼴이 되어 버렸다. 알렌은 일본의 배신행위를 저주, 이를 계기로 반청친일정책에서 반일친러정책으로 급선회 한다. 알렌은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Karl Waeber)와 협의하면서 강력한 반일친러 정책을 폈다. 그러한 정책 전환의 기본틀은 미국의 국익수호와 조선의 주권존중, 즉 조선왕실 보호라는 미명이었다. 그러나 알렌이 반일친러 정책과 조선 국내 문제에 깊숙이 개입한다는 이유를 들어 본국 정부는 견책을 내렸다.

3. 러시아 지배기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고종이 경복궁으로부터 정동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과 동시에 김홍집 친일내각이 붕괴되고 친러내각이 발족됨에 따라 러시아의 한국지배기는 시작된다.

러시아는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러시아 해병으로 하여금, 고종이 머물고 있던 공사관을 엄히 수비하게 했다. 친러파가 집권한 직후 민영환을 특명 전권 공사에 임명, 1896년 3월 니콜라이 황제대관식에 파견하였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이홍장도 이 행사에 참석했는데, 이때 러·청 밀약(1896. 5. 22.)을 체결하고, 시베리아 철도의 만주 종단 연결 등 극동아시아로의 남진정책을 이어간다. 또한 러시아는 대한 팽창정책을 강도 있게 추진하기 위하여 슈페에르(Alexis de Speyer)를 새 주한공사에 임명하는 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였다. 슈페에르는 철두철미한 대한 팽창론자였고, 따라서 러시아 세력의 신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반미반선교적(反美反宣敎的, Anti American, Anti Missionary) 무력외교를 펼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를 파한하려는 저의를 알아챈 알렌과 대척점에 서게 되었고, 따라서 알렌은 반러친일 정책으로 전환하여 이에 맞섰다. 슈페르트는 친러파 영수 이용익(李容翊)과 제휴, 대한지배권을 한층 강화하려고 노력했지만 본국 정부의 뜻에 배치되었던지 곧바로 소환되어 버렸다. 그는 부임 초부터(1896. 1. 13~1898. 4. 12.) 지나치게 설쳤다. 그러나 이 기간이 사실상 러시아의 한국 지배기라 할 수 있다. 러시아는 군사교관을 파견하는가 하면, 한국정부와 교섭하여 1896년 8월 29일 압록강, 두만강, 울릉도 등지의 삼림벌채권 등 군사, 경제, 종교, 정치적인 면에서 이권을 챙기고, 한동안 우리의 내정에 깊숙이 간여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은 영국, 미국, 일본의 공동대처로 말미암아 날개를 펴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1898. 3. 11.)

1898년 4월, 러시아 세력이 후퇴한 뒤 일본이 사실상 한반도 우월권을 장악하게 된다. 러시아가 팽창정책을 포기하고 한반도로부터 철수하게 된 배경에는 몇 가지 주요한 요인이 작용하였다.

첫째, 일본은 정치적 외유책(外柔策, the velvet glove)에 의해 한국정부로 하여금 러시아 세력을 제거하게 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갑신정변 실패로 10여 년 간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서재필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1896년 7월 ‘독립협회’를 창립하도록 했다. 독립협회는 ‘한국을 강한 독립국가, 자립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든다.’를 표방하고 있었다. 이는 곧 그 당시 한국 지배자인 러시아 세력으로부터 독립, 나아가서는 러시아 세력의 제거를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일본은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으로 독립협회로 하여금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는데 앞장서도록 유도한 것이다. 일본은 독립협회의 활동을 적극 지지하면서 후원했다. 그것은 독립협회의 설립취지와 목적이 바로 일본의 대한(對韓) 관심사와 일치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도 좋은 효과를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재필은 1896년 4월 9일 순 한글판 <독립신문>을 창간하면서부터 러시아와 친러파에 드러나게 공격적인 논조를 폈다.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운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 영·일 양국의 협조체제가 성과를 거둔 것이다. 영·일 양국은 러시아의 남진정책에 공동대처 하였으며, 1902년 1월 30일 영일(英·日)동맹 체결로 발전했다.

셋째, 러시아 지배기간에 미국은 러·일 양국에 대해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대일동정심(對日同情心)을 견지했었다. 알렌은 본국 정부의 이 같은 친일적 태도에 동조하면서 영·일의 대한정책과 협조하고 제휴함으로써 러시아의 한반도 철수를 실현시켰다.

알렌이 서재필을 적극 후원하게 된 배경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서재필은 일본당국의 배려에 의해 미국망명지로부터 귀국한 인물이라는 점과 그가 표방하는 ‘독립’이란 곧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고 있어서였다. 이는 일본의 대한정책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독립협회의 반러시아 활동이 상당부분 효과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재필은 한국정부와 10년간 고빙계약으로 중추원(中樞院) 고문직에 재직하면서 독립신문을 통해 노골적인 반러운동을 펴는가 하면 일본에 동조하자, 국란에 처한 한국정부로서는 대단히 불편한 존재로 여겨 서둘러 해고 조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알렌은 서재필이 미국 시민권자임을 내세워 미국 공사관에서 그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10년간 고빙계약에서 잔여 임기 8년간 봉급 전액을 상환·지불할 것을 한국정부에 강력히 촉구했다. 이 문제는 한국 외부(外部, 외교부)와 분쟁의 씨앗이 되었는데, 결국 봉급을 지급하는 대신 서재필이 한국을 떠난다는 조건으로 타결을 보았다. 알렌의 특별 배려에 힘입어 서재필은 8년 치 봉급 전액을 챙기고 1898년 12월 23일 한국을 떠났다. 한편, 알렌이 독립협회를 적극 지지 후원했다 해서 보부상(褓負商)들은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는가 하면 미국공사관을 습격, 파괴하겠다고 겁박하였다.

넷째, 알렌은 일본이 추진하고 있던 철도부설권을 획득할 수 있도록 도왔다. 러시아 세력의 후퇴로 한국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반사적으로 커졌다. 한국은 이제 일본의 지배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러시아 지배기에는 친일반러 정책을 고수했던 알렌도 일시적으로 정책 방향을 상실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던 모양이다.

4. 러일전쟁 전후기에 있어서 알렌의 친러반일 정책과 한국국권 보전 문제

이제 독립협회는 일본의 동정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이유는 한국이 러시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랐지만, 일본의 강제로부터 독립되는 것은 그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렌은 러시아 후퇴 후 일본의 한국 지배방식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공격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알렌공사는 국무성에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점차로 일본은 한국을 자기 나라의 특별활동 영역으로 간주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을 한갓 훼방꾼으로 생각할 정도로 대한침략 야욕을 노골화 하고 있다.”라고 보고하면서, “현재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지배를 묵인하고 있으며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밝히고 이제 일본의 한국지배는 불가피한 운명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알렌은 1884년 의료선교사로 내한한 이래 근 20년간 한국에 장기체류하는 동안 왕실과 친분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정확한 정보를 입수, 우리의 내정을 속속들이 꿰뚫어보고 있었다. 일개 외국공사에게 궁중을 무상출입하도록 허용했다면 오늘의 관점으로 볼 때 한심하기 짝이 없다.

최근 리비아(Libya)의 카다피 대통령은 이베리아(Iberia)반도 남단 지브랄타(Gibraltar) 해협에 있는 인공위성 정보망에 포착되어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알렌은 한국의 사태 진전을 지켜보고 일본의 한국지배 방식에 분개하면서 이러한 행위는 어리석고 비겁한 짓이라고 통박하였다.

본국 정부로부터 「외교훈령 64호」(1895. 11. 11.)가 하달되었는데, 여기에는 대한불개입정책 및 친일정책을 고수하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그렇지만 알렌은 이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한국을 구제하지 않으면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며, 그 결과 미국의 이권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 당시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행정부 동아시아정책수립 담당자는 전 주한미국공사 록힐(William W. Rockhill, 재임 1886. 12. 11.~1887. 4. 11.)이었는데 미국은 한반도에서 러·일 간에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이에 불개입하며 초연한 중립외교를 취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 원칙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적으로 친일, 반러 정책으로 기울고 있었다.

대한불개입 정책에 따라 루스벨트, 한국 포기
한국을 일본에 넘기는 대가로 노벨평화상 수상도

록힐의 이러한 대한불개입 정책에 따라 루스벨트는 ‘한국을 포기하는 정책’을 보다 확고히 하게 되었다. 하여 한국은 어차피 러·일 양국 중 어느 한 나라에 지배될 운명이며, 러시아보다는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친일, 반러 정책을 한사코 고집하였다. 알렌은 이와 같은 대한정책을 극히 위험한 실책이라고 지적하면서, 본국 정부와 담판하기 위하여 귀국을 서둘렀다.

그는 1903년 6월 1일 인천항을 출발 여순(旅順), 대련(大連)을 거쳐 만주를 시찰하고, 새로 개통된 시베리아 대륙 횡단철도로 러시아 수도까지 철도여행을 택하였다. 여행하는 동안에 광대무변한 러시아의 국토, 무진장한 천연자원이 러시아의 장래를 보장해 주고 있다고 느꼈으며, 알렌은 러시아가 ‘경이의 나라’(Wonderful Country)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워싱턴에 도착한 알렌은 1903년 9월 30일 저녁 세리온(Serrion)에서 루스벨트 대통령, 록힐, 알렌 3자 회담에 참석한다. 이 자리에서 알렌은 다음과 같은 친러반일 정책을 설득력 있게 대통령에게 개진했다.

첫째, 러시아는 만주를 평정하고 동시에 도로와 철도를 건설함으로써 엄청난 상업시장(A Great Commercial Field)을 개발해 놓았는데 이처럼 발전해가는 만주무역 거래의 75%를 미국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둘째, 러시아는 문호개방(Open Door Policy) 정책을 엄수하겠다는 강력한 약속(Compelling Promises)을 했다. 셋째, 러시아는 결단코 만주로부터 철병하지 않을 것이다. 시베리아 철도 건설이 이를 반증한다고 했다.

다음으로 알렌은 루스벨트 행정부의 친일반러 정책을 정면으로 공박하였다. 그렇게 되면 결국 미국은 일본의 간교한 외교술에 이용만 당하고 말 것이라고 전망했다. 러·일 양국은 적어도 미국에게 정신적 원조(Moral Support)를 기대하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알렌은 미국이 일본을 도와주면 일본은 결국 러일전쟁을 도발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일본보다는 러시아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알렌은 만약 미국이 친일반러 정책을 고집한다면 미·일 간에 위기국면(A Precipice)을 몰고 올 우려가 없지 않다고 경고하면서 “일본은 반미적 태도를 취하면서 미국에 날로 더 큰 곤란을 가져다 줄 것이고, 그리하여 마침내 미국은 일본과 칼을 겨누어야 될 처지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언하기도 했다.

결국 그의 예언은 적중했고 1941년 하와이 진주만 기습과 나가사키, 히로시마 원폭으로 치고받았다. 이는 대량 살상무기인 핵무기를 최초로 사용한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결국 러일전쟁(1904.2.)에서 일본이 전승을 거두자 왜제(倭帝)는 마침내 한국을 강점, 주권을 강탈하고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오욕(汚辱)을 안겨주어 지금도 고통에 시달리면서 통한의 삶을 살고 있다.

나쁜 정부를 심판 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

한편, 미국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er roosevelt)는 1905년 ‘한국을 일본에 넘긴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포츠머스(portsmoth) 회담을 주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본국으로 돌아간 알랜은 한국에서 일군 제물로 부동산 갑부가 되었다.

세계 어느 나라이든 ‘정권은 잠깐이요 국가는 영원하다’는 것은 만고에 진리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 국민위에 군림하려는 반민주정권은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다. 그게 민주주의의 장점이자 국민이 나쁜 정부를 심판 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이다. 우리는 지금 냉전구도의 산물인 ‘북핵문제’로 미증유의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또한 4·13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있기도 하다.

지난시대를 거울삼아 미·일동맹과 미·중간의 거래가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자. 혹여 우리정부가 닭 쫓던 개처럼 지붕만 쳐다보지 않는가도 눈여겨보자. 제삿집 강아지처럼 떼 지어 몰려다니는 정상배들도 과감히 가려내어 도태시키자.

* 이 글은 구한말 격동기 비사(秘史), <알렌의 일기 : 김원모 완역-단국대학교 출판부(1991년)> 발행을 읽고 간추려 본 것이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