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록문화유산(6) 등과시말기(登科始末記)
호남기록문화유산(6) 등과시말기(登科始末記)
  • 조일형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6.03.03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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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8년 광주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옛 책속에 묻혀있는 한편의 글, <등과시말기(登科始末記)>

넓은 모래밭에 아름다운 진주가 묻혀 있듯이, 옛 책의 바다 속에도 놀랍도록 중요한 글들이 실려 있다. 바로 <등과시말기(登科始末記)>이다.

▲수촌 고정봉이 작성한 부(賦) 시권(試券)- 《장군수》
조선시대 광주의 인물 중에 수촌(水村) 고정봉(高廷鳳, 1743~1822)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고경명의 7대손으로 《수촌집(水村集)》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그 문집 속에는 1798년 광주에서 시행된 공령과(功令科)라고 하는 특별시험의 전말을 소개한 <등과시말기(登科始末記)>라고 하는 글이 있다.

보통 일반적인 과거시험은 생원·진사시와 대과(大科)로 나뉜다. 각각 1차(초장), 2차(중장), 3차(종장)에 걸쳐 시행되는데 생원·진사시의 1차는 각 지방에서 시행됨으로 향시(鄕試)라고도 한다. 향시는 도과(道科)의 일종이다. 공령과(功令科)도 분명 지방에서 시행된 향시(鄕試)이며 도과(道科)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행 과정과 시험 출제 등 제반 사항이 모두 정조임금의 주관 하에서 이루어졌으며, 시험에 참여한 사람도 특별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이 밖에도 기존 과거시험과는 다른 여러 가지 특별한 점들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내용이 수촌 고정봉의 <등과시말기(登科始末記)>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수촌의 아버지는 고영(高暎)이고 어머니는 김기린(金麒瑞)의 딸이다. 김 부인이 상서로운 해를 가슴에 품는 꿈을 꾸고 낳았다하여 고정봉의 아명을 봉일(捧日)이라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어른처럼 의젓하였고 성심으로 학문에 진력하여 공부하는 책상이 거의 뚫어질 듯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는데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여 선대의 사업을 잇지 못하고 가문을 떨쳐 일으키지 못함을 고정봉의 아버지 고영은 항상 안타까워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의 유언도 과거에 합격하여 꼭 쇠퇴해 가는 집안을 일으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58세라는 연로한 나이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하였고 효행과 문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동국의 안자(顔子)’라는 평을 받았다.

<등과시말기(登科始末記)>는 그의 문집인 《수촌집(水村集)》 권3에 실려 있다. 권3에는 그 외에도 공령과에서 그가 작성한 시권인 부(賦)·의(義)·책(策)이 실려 있어 공령과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수촌집》은 목활자본, 7권 3책으로 1930년에 정인보(鄭寅普, 1893~1950)가 쓴 서문과, 1929년에 윤영구(尹寗求, 1868~1941), 고광선(高光善, 1855~1934)이 쓴 서문이 함께 실려 있다.
▲수촌 고정봉이 작성한 대책문(對策文) 시권(試券)
광주에 공령과를 시행하여 충신의 후손을 선양하라

광주에 공령과를 시행한 배경에는 정조가 주관하여 간행할 도서를 교열한 호남 유생들의 노고에 보답하는 뜻과 옛 충신의 후손을 발굴하여 선양하고자 하는 의도가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호남을 ‘인재의 부고’요, 광주를 ‘호남 명현 배출의 고을’이라고 부를 만큼 신뢰하였고 유생들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또한 그런 호남에 대한 명성을 전국에 천양하여 서울이나 지방 할 것 없이 전국의 모든 유생들이 학문에 정진하는 풍토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유의(大學類義)》 등의 어정도서를 교열케 하여 호남에서 경술에 능한 선비의 조언을 듣고자 한 것이다.

정조는 그의 재위시절에 충신과 그 후손에 대한 선양사업을 활발히 하였다. 호남 지역의 충신인 김덕령, 고경명, 고인후, 고종후, 김천일, 양대박 등에 대한 사후 벼슬을 내리고, 그 후손에게 벼슬을 내리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1785년(정조9) 전라도 유생 기석주(奇錫周)의 상소에 의해 김덕령에게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내리고, 그 형 김덕홍(金德弘)과 그 아우 김덕보(金德普)에게 포장(褒奬)하여 증직(贈職)을 내렸다. 1788년(정조11)에는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에게 시호를 베푸는 날에 함께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또한 같은 해 11월에는 충장공 김덕령의 유고와 수적을 호남백(湖南伯)으로 하여금 출판하여 반포하게 하였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 마을에 ‘증 병조판서 충장공 김덕령 증 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贈兵曹判書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라는 비석을 세우게 하였으며, 그의 형 김덕홍(金德弘)도 함께 비기(碑記)에 기록하라고 하였다.

1796년(정조20)에는 양대박에게 정경(正卿)을 증직하고 시제(諡祭)를 내렸으며, 그의 문집인 《청계집(靑溪集)》 및 《창의록(倡義錄)》을 내각으로 하여금 도신에게 내려 보내어 판본을 만들어 인쇄하여 올리게 하였다. 그의 아들 양경우도 아버지를 닮아 충성스럽고 용감하며 굳세고 곧다고 하면서 한 품계를 더하여 주고 그가 지은 《제호집(霽湖集)》도 똑같이 인쇄하여 올리도록 하였다. 또한 추증한다고 사령장을 내리는 날에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한 충렬공 고경명에게 한 번도 치제(致祭)를 하사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양대박과는 백중지간(伯仲之間)이니 이번 기회에 충렬공에게도 동시에 치제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 해 10월에는 양대박에게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렇듯 정조가 옛 충신과 그 후손들을 선양하는 사업에 활발했던 배경에는 그들을 표장하여 현재의 신하들에게 사표로 삼게 하여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고히 하려했던 의도가 있었다. 자신의 지지 기반이 약한 현실에서 옛 충신과 그 후손에 대한 선양은 신하들에게 충성심을 자극할 수 있는 수단으로 작용했을 것이며,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공령과(功令科)라고 부르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엿보다

공령과는 1798년(정조22) 4월 13일, 광주목 객관에서 설행되었다. 당시 광주 목사였던 서형수(徐瀅修, 1749∼1824)가 특별히 시험을 주관하였다. 공령과는 초장(初場)·중장(中場)·종장(終場)으로 3일 동안 3차에 걸쳐 진행이 되었는데 시험과정은 엄중하게 관리되었다. 유생들의 수에 맞추어 과장(科場) 내에 천막을 설치하고 각 1인씩 앉아서 시험을 보게 하였으며 군교(軍校)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다. 초장(初場)은 시(詩)·부(賦)를 보았다.

시(詩)의 제목은 ‘면앙정을 가마에 태우다(荷輿俛仰亭)’였고, 부(賦)의 제목은 ‘장군수(將軍樹)’였다. 면앙정 송순은 4대 사화(士禍)가 일어난 혼란한 정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1년여의 유배생활 빼고는 비교적 순탄한 관직생활을 하였고, 90여 세로 장수하였다. 전남 담양 출생으로 27세인 15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대사간,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중종실록》과 《명종실록》을 찬수하였다. 김인후, 고경명, 정철, 임제, 기대승 등 당대 석학들을 제자로 두었으며 면앙정 가단(俛仰亭歌壇)을 이끌었다. 1579년 과거급제 60년을 기념하는 회방연(回榜宴)이 면앙정에서 개최되었는데, 정철의 제안으로 제자 몇 명이 송순을 가마에 태우고 집으로 모셨던 일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스승에게 존경을 표하는 성대한 일이며 조선시대 처음 있는 일이라고 감탄하였다. 호남에 있었던 경사스러운 일이기에 정조가 직접 시험문제로 출제한 것이다.

장군수(將軍樹)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가 어렸을 때 전쟁놀이를 하고 놀았다는 전주부에 있는 나무이다. 《완산지》를 보면 “발산 남쪽에 있었던 일로 전해 오기를 목조가 어릴 적에 아이들과 노닌 곳이라 한다. 여러 아이들을 모아 놓고 큰 나무 아래에서 진법을 익힌 곳이었으니 당시에 사람들이 그 나무를 일컬어 장군수라 했다. 나무는 없어졌으나 유지(遺止)는 그대로 있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고정봉은 부(賦)를 보았는데, 응시자 중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 초장에서 1등을 차지한다. 고정봉이 공령과에 장원을 하는데 부(賦)의 점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공령과 합격자 명단과 포상 내용을 써놓은 어고방목(御考榜目)
종장(終場)은 대책문(對策文)으로 ‘호남의 7가지 폐단을 묻다(問湖南七弊)’이다. 대책문은 문과 시험과목의 하나로,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묻고 그에 대한 답변을 적게 하는 시험으로, 당시 호남 선비들이 가장 어려워했던 부분이었다. 고정봉이 마지막 종장 대책문을 본 소감과 당시 시험장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나는 과거문체에 소질이 있어 초장엔 부(賦)를 중장엔 의(義)를 보았는데, 종장에 이르러서는 남은 자 가 반이요, 떠난 자가 반이었다. 나도 대책문의 규칙을 대강만 이해하고 있어서, 한 폭의 지면을 겨우 채우니 3개의 촛불이 다 타 시간이 다 되었으므로 대강 쓰고 시험지를 제출했다. 어찌 과거 합격을 제가(制可) 받을 희망이 있었겠는가.”

실제로 그가 작성한 대책문 답안지를 살펴보면, 호남의 7가지 폐단인 結役, 糶糴, 均稅, 漕轉, 軍政, 關防, 法令에 대해 대책을 마련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기 보다는 시험문제지에서 언급한 폐단을 반복하여 답안지에 작성하였을 뿐이다. 시간도 부족하여 성급하게 답안지를 마무리하였다. 점수는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 고정봉은 대책문에 자신이 없어 합격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시간도 부족하여 성급하게 답안지를 마무리하였다. 점수는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 초장의 시와 부, 중장의 전이나 의, 종장의 대책문에서 보듯이 시험문제가 모두 호남에 관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호남에서만 설행된 시험이므로 정조가 일부러 호남과 관련된 문제들로만 출제한 것이다.

당시 경서의 교열에 참여한 호남유생은 모두 공령과에 응시한 것으로 보이는데 총 응시자는 69명이었다. 그 중 합격자는 5인이었고, 장원은 공동 2인으로 고정봉과 임흥원(任興源) 이었다. 장원한 사람은 직부전시(直赴殿試, 최종시험인 종장에 바로 응시)의 자격을 부여받았으며 합격자 3명도 조경묘(肇慶廟),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으로 임명되거나 직부회시(直赴會試)의 자격을 부여받았다. 특이한 점은 응시자 전원에게 혜택이 부여되었다는 점이다. 그 시험에서 장원한 고정봉은 ‘세독충정(世篤忠貞)’의 후손이라 하여 정조의 특별한 예우와 관직을 제수 받았다. 지금도 고경명이 직접 쓴 ‘세독충정(世篤忠貞)’의 유묵(遺墨)이 고씨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고경명이 직접 쓴 ‘세독충정(대대로 충성과 절개를 돈독히 하라)’의 글씨
정조는 고정봉이 고경명의 후손임을 가상히 여기고 특별히 가주서(假注書)와 전라도사(全羅都事)라는 직책을 내렸으며 전라도 전최(殿最, 인사고과)에서 고정봉이 낮은 점수를 받자 승하하기 직전까지도 마음에 담으며 불편해 하였다. 고정봉도 58세라는 연로한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좀 더 일찍 합격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고 집안을 천양하지 못한 점에 대해 무척 아쉬워했다. 고정봉의 <등과시말기(登科始末記)>라는 글을 보면 이러한 공령과가 전개되는 과정, 합격자 포상 및 예우 등의 과정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공령과라는 다소 생소한 시험의 전말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한편의 글이 없었다면 1798년 광주에서 시행된 공령과라는 특별시험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선조들이 남긴 지방문헌의 중요성이 여기서 또 한 번 여실히 들어난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옛 것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방문헌이 소중하게 잘 관리되고, 관련 연구자들에게 제공되어 활발하게 연구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연구 환경이 나아져서 지방문헌의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조선시대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하사하던 종이꽃인 어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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