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뉴 이어’ 인사가 두려운 세모
‘해피 뉴 이어’ 인사가 두려운 세모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5.12.30 16: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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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고문
성탄절에 메리 크리스마스가 상식이듯 송구영신의 세모에는 ‘해피 뉴 이어’가 맞다. 그런데 이번 세모에는 그 인사가 주저된다. 한일 간의 종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소식이 낭보가 되지 못하고 굴욕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국가 간의 외교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일본 수상의 미흡하다 못해 애매한 태도와 변명에 급급한 한국 외교당국의 자세는 우리가 주권국가임을 의심케 한다. 그것마저 미국의 권고로 이루어졌다는 해외의 소식들은, 당사자인 할머니들의 뜻과 국민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과 함께 주권국가 국민임을 부끄럽게 한다. 그래도 대일외교만은 했음에도, 역시나 할 밖에 없는 박대통령에 대한 시중에 낭자한 평가들을 상기하게 만든다. 그녀가 애용하는 국민과 나라는 습관성 언설로 스님들의 구두선과 같은 수준으로 거기에 진정성이 깃들 여지는 없는가 싶다.

오비이락 격으로 한겨레 이봉걸 칼럼의 ‘착취형 성장정책의 파국적 종말’을 보게 되어, 필자의 대통령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은 더욱 증폭된다. 칼럼이 지적하는 대통령의 성향이 무지와 편견, 아집 그리고 무모한 자기합리화와 자화자찬으로 뭉뚱그려졌음에 공감하면서, 그러한 대통령의 시대를 사는 것이 나 혼자만이 아님을 자위한다. 아울러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남 몰래 외칠 수밖에 없었던 나라의 후손이, 대통령의 성향을 외람되게 이죽거릴 수 있는 것은 민주공화국에 사는 국민만이 누리는 기본권인 것 같아 그야말로 대한민국 만세다.

노동법을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통해서라도 기필코 통과시키고자 하는 서슬에 꼼짝 못하는 여당의원들도 꼴불견이거니와 야당의 본색을 상실해버린 새정연(더불어민주당?)도 국민의 우군인 성 싶지 않아, 민주화만이 살길로 아는 이 땅의 민초들은 우울한데, 무정한 세모의 한파는 매섭기만 하다.

이미 권력과 금력 밖의 소외자들로 추락해 가는 이 땅의 백성들의 고달픈 삶은 지금 여기서 바로 시작된 것만은 아닌 것 같아 더욱 속상하다.

개발독재, 신자유주의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말하는 박세길 교수의 “미래를 여는 한국인 史”를 참고하기로 한다. 박세길 교수는 비관취를 못 버리는 필자와는 다르게 총량적으로 평가하여 자주·민주·통일의 과제가 51% 이상 진척되었다고 평가하고, 이제 새롭게 제기되어야 할 과제로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라 지적하고, 그것을 수행할 주역은 신세대임을 암시한다. 현대사를 보는데 있어서 당파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시각은 박정희 시대의 국가가 성장의 기관차 역할을 했던 것을 직시하면서도 경제성장 자체가 모든 것을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님을 지적하며, 경제성장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회구성원들의 삶을 북돋기 위한 수단임을 말한다. 그런데 모든 사회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데 한계를 갖게 만든 태생적 조건은 그의 정권의 기반인 군부가 미국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의 정권은 개혁의 한계를 갖는 우파성을 띄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한계는 당시는 조건이었지만 오늘의 박근혜 정권에게는 당위적인 수준으로까지 전이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성장의 몰가치적 성과까지도 그의 정치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의 지배층이 되어버린 기득권세력은 주로 투기적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소득원이 되었던 것은 부동산 투기였다. 이렇게 이루어진 부는 전 시대에 그 생명력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금융자본이 맹위를 떨치는 신자유주의의 강력한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토지는 생산시설이 되기도 하지만 주거공간이 되기도 한다. 토지는 노동과는 무관하게 이미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토지공개념은 논리상으로 정당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은 토지를 사유재산화 하였는데, 한국에서 그 정도는 더욱 심하다. 전체 토지의 77%가 개인토지로 된 나라는 한국으로 도시국가인 싱가포르 83%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한국은 인구밀도가 높고 수출로 획득된 부가 항구적으로 안착할 수 있는 근거로 토지가 이용되었는데, 삶의 향유도를 가늠할 수 있는 주택공간의 부족은 땅이 부동산 투기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되었다. 천정부지로 오르기만 했던 경인지구의 아파트 가격이 이를 실증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제개발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국가권력이 권력의 사적 목적으로까지 투기를 조장했고 그러한 결과는 정경유착의 화려한 악의 꽃, 악의 화원을 일궈냈던 것이다.

시작의 미약함을 축복하면서 미래의 창대함을 기대할 수 없었던 우리 현대사의 왜곡성이 아프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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