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누정문화의 재조명1 - 누정과 문학
호남 누정문화의 재조명1 - 누정과 문학
  •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
  • 승인 2015.11.16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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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소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창의주도형 지원사업의 하나로 호남의 누정문화를 새롭게 알아보는 자리를 마련한다. 누정문화가 단순히 옛 선조의 장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되살려 우리의 신문화로 정립할 수 있는 창의적인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이번 기획에는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이 함께 했다. 편집자주

① 독수정(獨守亭)

사시사철 변함없이 푸른 잎을 가지고, 고결한 선비를 상징하는 대나무는 담양의 대표적 상징물이다. 담양에는 대나무만큼이나 고결한 선비와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 하나가 더 있는데, 바로 담양군 남면에 위치한 독수정이라는 누정이다.

독수정은 고려 후기 무신인 서은 전신민이 고려 말 병부상서로서 다난한 국사를 담당하고 있었을 때,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8~1392)가 이성계 일파에 의해 선죽교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이 곳 산음동에 내려와 지은 누정이다.

죽지 않고 은둔한 신하, 전신민

흔히 의리와 원칙을 지켜나가며 관직과 재물을 탐하지 않고 인품이 고결한 사람을 ‘대쪽 같은 선비’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독수정을 세운 전신민이 그러하다. 독수정에 걸려 있는 많은 현판 중에 당시 그가 독수정을 세우고 지은 〈독수정술회(獨守亭述懷)〉라는 제목의 현판이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지난 풍우에 마침내 가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왔으니 곧 서석산 북쪽 기슭 10리쯤이었다. 여기에 거처를 삼았으나 난세의 고신(孤臣)인 나는 나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그저 죽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며 서글픈 마음을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을의 동쪽 기슭 높은 곳, 시내의 굽이진 곳 위에 작은 정자를 짓고 독수정이라 이름하였다.”

여기에는 그가 난세의 고신으로 나라 잃은 서글픈 마음에 은둔의 뜻을 품고 독수정을 지은 연유와 당시의 그의 시름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어떻든 자신만은 홀로 고려를 사랑하는 뜻을 지키며 살겠다는 충의의 표상으로 정자의 이름을 ‘독수(獨守)’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의 시를 남겼다.

세상 일 막막하여 내 고민만 깊어지니 風塵漠漠我思長(풍진막막아사장)
구름 낀 숲 어디에 늙은 이 몸 맡길까 何處雲林寄老蒼(하처운림기노창)
천 리 강호에서 두 귀밑머리 희어지니 千里江湖雙鬢雪(천리강호쌍빈설)
천지간 백 년 인생 한 결 같이 구슬퍼 百年天地一悲凉(백년천지일비량)
저 무성한 풀은 봄을 상심한 원한이고 王孫芳草傷春恨(왕손방초상춘한)
달빛에 절규하는 듯 저기 진달래 꽃들 帝子花枝叫月光(제자화지규월광)
이곳 청산은 뼈 묻을만한 곳인가 하니 卽此靑山可埋骨(즉차청산가매골)
홀로 지키자 맹세하고 이 정자 지었네 誓將獨守結爲堂(서장독수결위당)
죽지 않고 은둔한 신하 전신민[未死遯身 全新民]

사물의 모든 이름은 그 사물의 의미를 담고 있듯이 그가 지은 누정도 그 심오한 뜻을 지니고 있다. 항일 운동가인 김녕한(金寧漢, 1878~1950)이 지은 〈독수정기(獨守亭記)〉에, 독수정의 ‘독수(獨守)’라는 글자는 이백(李白)의 시〈소년자(少年子)〉라는 작품의 마지막 부분인 “백이 숙제는 누구인가! 홀로 서산에서 절개를 지키며 굶주렸다네[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백이와 숙제가 서산에 은거하며 은나라에 대한 충의의 삶을 살았듯이 그도 또한 국운이 다해가는 고려를 위해 충의로운 삶을 선택했던 것이다.

전라남도기념물 제 61호, 독수정 원림

위의 시의 마지막에 그는 스스로를 “죽지 않고 은둔한 신하[未死遯身]”로 자서(自書)하며, 영원히 두문불출할 맹세의 뜻을 보이고 있는데, 실제로 조정에서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충절을 지켰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이곳에서 아침이면 조복을 입고 북쪽 송도를 향해 곡배(哭拜)를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다른 누정과 달리 독수정은 북쪽을 향하고 있으니 그의 충절을 엿볼 수 있는 한 대목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누정의 입구에 세워진 그의 신도비에도 기록되어 있다.

독수정은 조선조 건국 초에 건립된 누정으로, 담양에 최초로 건립된 누정으로도 전한다. 그러한 전신민이 세운 원래의 누정은 없어지고, 1891년(고종28) 퇴폐한지 200여년 후에 그의 14대손인 홍혁(泓爀)과 그의 종형인 재혁(在爀), 경탁(敬鐸) 등이 선조의 유적이 인멸됨을 개탄하여 누정을 재건하였다.

이어 1913년에는 홍혁(泓爀)과 15대손 규환(奎煥) 등이 초막의 형태였던 것을 기와지붕으로 바꾸어 중수하였으며, 이것을 다시 16대손 회종(會鐘)과 완종(完鐘)이 1972년에 중수하였다. 그 이후 여러 차례의 보수를 하였으며, 2015년 최근에 기와와 서까래 등을 다시 개보수하였다.

현재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72년에 중수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 창건연대가 짧아 아직 문화재로는 지정 받지 못하고 있다. 다만 독수정의 주변에 자라는 소나무, 백일홍, 모과나무 등 울창한 수목들이 잘 보존되고 있어 1982년 독수정의 원림은 전라남도기념물 제 61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누정의 꽃이 되는 현판

이 누정은 당시 명망 있는 문인들과 각 지역의 지식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데, 누정에 걸려있는 현판이 이를 말해준다. 독수정에는 〈독수정십사경(獨守亭十四景)〉, 후손 재혁(在爀)이 〈독수정원운〉에 차운한 〈경차독수정원운(敬次獨守亭原韻)〉, 중추부사를 역임한 후손 전권(全權)과 김인후의 후손인 김동수(金東洙) 외 13인이 지은 〈선정유허유감(先亭遺墟有感)〉, 김영한(金寗漢)의 〈독수정기(獨守亭記)〉, 송병선(宋秉璿)과 후손 홍혁(泓爀)의 〈독수정중건기(獨守亭重建記)〉및 〈독수정중수기(獨守亭重修記)〉 등 총 12판의 현판이 걸려있다.
이 현판들은 오늘날의 독수정을 있게 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만큼 누정만큼이나 보존되어야할 중요한 문화재인 것이다.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에서는 문화재 보존의 하나로 시민의 소리와 함께 광주․담양의 8대 누정으로 선정한 독수정, 면앙정, 명옥헌, 소쇄원, 송강정, 식영정, 풍암정사, 환벽당에 걸린 모든 현판을 탈초 및 번역했다. 아울러 중국 관광객을 위한 누정홍보영상이 포함된 도록집 간행을 앞두고 있다.

http://www.memoryhonam.co.kr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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