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광주공원
다시 보는 광주공원
  • 신문식 시민기자
  • 승인 2015.10.24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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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참상을 간직한 광주 정신문화 교육장

▲ 민족의 참상을 간직한 광주공원.
광주공원은 푸른 숲과 맑은 공기, 쾌적한 쉼터와 자연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수십 년 동안 광주시민의 가슴속에 자리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도시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삶의 활력과 편안함을 제공해 주는 자연치유 공원으로 원래 성거산이라 이름했다.

광주공원은 잘 어울려진 숲과 맑은 공기로 항상 사람들이 벅적거리는 쉼터이자, 체력단련장이며, 정신 교육장이 되기도 했다. 또 사랑을 속삭이는 데이트 장소이며 자신을 재충전하기 위해서 산책하는 등 공원의 역할을 다하는 도시 종합공원이다.

또한, 광주공원은 한편으로 역사의 수레바퀴가 잘 못 뒤엉켜 슬픈 역사의 참상이 있었는가 하면, 두 번 다시 없어야 할 일제강점기 36년의 민족의 설움과 수난의 역사가 숨어 있는 민족의 슬픈 현장이다. 정의와 애국을 부르짖는 정신교육 현장으로 광주공원의 깊은 내막을 보면 광주 호남인의 인문학의 산실이자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으로 역할을 다하는 곳이 광주공원이었다.

성거산에는 조선조 진시 합격을 한 이들이 합숙하며 정진하던 ‘사마재’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사마재는 일제강점기에는 보통공립학교로 활용되다가 광주 최초의 금융조합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사마재의 역사적 의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광주공원에는 순국비가 자리하고 있고 4·19 기념비, 5·18민중항쟁 전적비, 석서정 등이 있다. 옛 선인들의 정신문화 유적이 발길 닿는 곳마다 서려 있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 석서정
 

▣ 석서정에 숨은 뜻은?

광주공원은 광주천에 풍부한 물을 마시면서 푸른 녹지를 자랑하면서 물로 피해를 보는 시기에 대한 역사를 석서정에서 볼 수 있었다. 석서정은 비가 많이 모면 홍수의 피해를 막기 위해 광주천의 물을 분산시키게 하였던 광주 목사 김상의 지혜를 볼 수 있는 현장이자, 광주가 ‘빛고을’ 이라는 이름을 목은 이색으로부터 갖게 된 최초의 기록을 간직한 곳이다.

지금은 광주공원 앞에 자리를 잡고 있어 공원을 산책하다 시원한 광주천 유유히 흐르는 냇물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면, 광주 수난의 역사와 함께 현재 진행 중인 아시아문화수도 광주까지의 역사의 필름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석서정에는 또 두 시인의 낭랑한 목소리에 석서정을 중건하게 된 시대적 배경과 문화적인 동기를 알 것 같았다.

석서정 중건음 1.

“누런 국화 붉은 단풍 구월의 하늘 아래
병술의 복원 해를 크게 다시 환영하네.
폐허는 여전히 양파 물 위에 떠 있고
옮긴 유적 새로이 성수 앞에 단장했네.
중간 석축 흐름 나눠 농사 언덕 굳게 하고
양쪽 제방 두 곳 쌓아서 다리 건넘 연하였네.
두 현께서 짓고 쓰신 맨 처음 남긴 자취
잇고잇고 또 이어 억 만 세에 전 하리라.

이천육 년 (병술) 가을.
광주향교 전교 신형철.

석서정 중건 음2.

삿갓 같은 새 정자 가을 하늘에 새로워
그 뉘가 복원의 해를 축하하지 않으리.
출렁이는 시냇물 소리 발굽에 스며들고
장엄한 서석의 기상 뿔 앞을 제압하네.
허공을 뚫은 분수는 연못으로 떨어지고
밤이면 나타나는 무지개는 큰 다리에 이어졌네.
처음 세운 김상의 뜻 이어받아
광주천의 깨끗함 오래오래 전하길.

이 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석서정이 원래 이곳에 자리한 것이 아니고 양파정 앞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많은 물길을 나눠 제방을 넘지 못하게 하여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피해를 줄인 지혜에서 만들어 석서정임을 알 수 있고 김상 광주 목과 목은 이색과 깊은 인간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제 광주의 역사의 흐름을 잠깐 광주천 흐르는 맑은 물 영상에 눈과 귀를 기울였다면 광주공원으로 발길을 옮겨 맑은 공기를 흠뻑 마시고 인문학을 산책하며 심신건강을 단련해보는 기회를 만들자.

광주공원의 입구는 항상 차량과 인파로 벅적거린다. 광주문화재단과 광주노인복지관. 광주공원을 산책하는 사람이나 공원과 가까운 곳에 직장을 둔 사람들이 주차하는 공간으로 넘치고 넘치는 곳이 광주공원 입구 주차장이다. 조심스럽게 빽빽한 주차 물결 샛길을 피해 공원 계단에 발을 올려 디디는 순간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흐른다.

▲ 5.18의 참상을 증언하는 기념 조형물.
▣. 5·18민중항쟁 광주 공원광장 시민군 편성지를 알고 계신 가요?

해태 사자상이 길손을 반기며 신변을 보호하고자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잡귀 오는 것을 막고 있어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인문학을 산책하기에 좋았다. ‘광주공원’이라는 자연석 조형물과 ‘광주 5·18민중항쟁의 사적 20’ 호라는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공원을 오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2개의 조형물을 그냥 지나칠 수 있겠지만, 공주공원은 정의(옳음)와 슬픈(그름) 역사를 간직한 양면의 교육현장이라는 생각으로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보기로 한다.

‘광주 5.18민중항쟁사적20’이라는 조형물에는 쓰인 문구를 자세히 봤더니 “이곳은 5·18광주민중항쟁이 치열했던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나자 자위수단으로 인근 시와 군에서 총과 탄약을 가져와 시민군을 편성하고 사격훈련을 실시했던 곳이다. 처음부터 시민군은 일정한 지휘체계에 따라 움직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는 자연스레 지도자가 결정되어 24일 도청으로 통합될 때까지 광주 시내 순찰과 차량 등록 등 일시적이나마 치안 관련 업무를 보았다. 5월 27일 계엄군이 진압해 올 때 이곳에서도 시민군과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생각만 해도 오금이 싸늘해진다. 동족상잔의 아픔도 지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권력쟁취를 위해서 군인들이 시민과 접전을 했다는 슬픈 역사의 현장을 증언해주는 것이다. 자유라는 나무는 피거름을 먹고사는 나무라고 어떤 시인이 말했듯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초개같이 던진 영령들에게 삼가 고개를 숙인다.

▲ 광주공원 자연석 조형물
▣ ‘광주공원’ 자연석 조형물이 반갑게 인사한다.

‘광주공원’이라는 자연석 조형물은 듬직하고 둥그스름한 바위에 곱게 새겨진 글씨가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여기는 광주광역시 제1 도시공원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만나서 반갑습니다. 도시민을 위한 쾌적하고 아늑한 녹색 휴식공간으로 체력단련을 할 수 있는 각종 체육 공간이 있으며 충과 효의 요람으로 광주 정신문화를 배울 수 있는 산 교육장이며 사색을 즐기는 인문학 산책로 있는 숨은 역사 종합박물관입니다. 좋은 추억 만들어 간직하세요.” 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매우 정겨웠고 다정한 광주공원 둥그스름한 바위 얼굴에서 한없는 사랑을 느낀다. 저 ‘광주공원’ 자연석 조형물은 길손들에게 얼마나 많은 이야기꺼리를 말해줄 수 있을까? 얼마나 말해줄 수 있을까?

▲ 4.19영령추모비
▣청사에 빛나는 4·19학생 혁명 기념비

광주공원에 조성된 4.19혁명 기념비가 이처럼 썰렁하고 외소하게 건립되어서 심한 아쉬움과 함께 서운함을 느끼며 돌덩이 하나하나를 만져보면서 생각에 젖는다.
여기 조지훈 시인의 시에서 자유의 소중함을 간절하게 기록한 시가 있다. “자유라는 나무는 피 거름을 먹고 자란다.”에서 보듯이 4.19혁명은 부정과 독재정권에 항거한 젊은 학생들의 고귀하고 값진 피로 이룬 혁명이었다. 그러나 혁명 주체가 어린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민주당의 정권이 인수를 하였으나 정권부실과 내부싸움으로 5·16이라는 군사정권을 태동하게 하고 말았다.

조지훈 시를 낭송해 본다.

“자유여 영원한 소망이여!
피 흘리지 않곤 거둘 수 없는 고귀한 열매여!
그 이름 부르기에 목마른 젊음이었기에
맨가슴 총탄 앞에 헤치고 달려 왔더라.
불의를 무찌르고 자유 나무의 피 거름되어
우리 여기 누어있다.
잊지 말자. 사람들아 뜨거운 손을 잡고 맹세하던
아 그날 사월 십구일을
조지훈 지음.

▲ 조지훈 시.
그럼 4·19혁명은 1960년 3.15부정선거가 원인이 되어 1960년 4월 19일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의 죽음이 기폭제가 되어 불이 붙어서 전국으로 번져 1960년 4월 26일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시위군중의 독재타도 외침의 소리에 자유당 이승만 독재정권은 버티지 못하고 12년 장기정권을 마감하고 결국 하야를 했던 학생혁명운동이다.

이승만 정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 장기집권을 하였다. 그리고 1960년 제4대 정·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한 선거에서 반공개투표. 야당 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 노골적인 부정선거 만행을 자행했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 때 민주시민의 눈으로 참을 수 없는 부정선거가 자행되자 마산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당국은 총격과 폭력으로 강제 진압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무고한 학생과 시민을 공산당으로 몰아서 고문을 가했다.

이후 1960년 4월 11일 1차 마산 시위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체 참혹한 시체로 발견됨으로써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제2차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4천여 명의 학생들이 “진정한 민주이념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 들자”라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중 괴청년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일부가 피를 흘리며 크게 부상했다.

이에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1960년 4월 19일 총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혁명적 투쟁으로 발전하자 자유당 정권은 무력탄압과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독재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지역 각 대학 교수단 300여 명은 선언문을 채택하자, 학생 시민들이 동참 1960년 4월 26일 노도처럼 성난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군중들은 무력진압에도 굽히지 않고 완강하게 투쟁하여 결국 이승만 정권은 하야하게 된다.

4.19학생 혁명은 자유당 독재정권의 비민주적 만행과 3.15 부정선거에 학생 시민들이 항거하여 성공한 혁명인데 혁명적 기념물 중에 광주공원의 4.19 영령기념비는 현재를 살아가는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너무 조촐하여 안타깝고 죄송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 공원의 계단은 역사를 알고 있다.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과 신사참배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뒤로하고 무거운 발길을 옮기며 두 번째 61계단을 밟으며 상념에 젖는다. 광주공원의 13여 개의 계단은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의 산물이라고 들었다. 광주공원은 1943년 4월 19일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945년에 해방되었으니 해방되기 전에 일제강점기에 공원으로 지정된 것이다. 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성거산이다. 일제강점기 성거산은 광주 신사 당을 만들어 참배하며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게 했던 나라 잃은 설움의 현장이 광주공원 계단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참배했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라를 잃었지만 잘사는 사람의 생각은 어찌했고 애국지사들은 소가 도살 창가는 기분이었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식으로 참배에 동참했을 것이다.

나라 잃은 슬픈 통한을 간직한 채 일본을 꼭 우리가 내가 망하게 해서 단군상 앞에 무릎을 꿇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은 또 몇 명이나 되었을까? 많은 사람이 일본을 몰아내야 한다는 애국지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늘은 우리 편에 서서 금수와 같은 만행을 자행한 일본을 전쟁에서 참패하게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항복하게 했다.

▲ 새로 만든 조형물 현충탑
▣민족상잔의 슬픈 현장 현충탑을 바라보며

하늘을 찌를 듯한 현충탑은 위상도 장엄하다. 70이 넘어서 바라본 현충탑은 젊은 시절에 보았던 탑이 아니고 새로 조성해서 건립하는 중이었다. 공사 안내판에 의하면 “공사명은 현충탑 제작 설치다. 공사개요는 기존 현충탑철거 및 제작 설치. 부대공사. 발주처는 광주광역시 사회복지과(062-613-3252). 시공사는 모모((주)피앤. (주)송학) 건설에서 공사를 하고 있는데 공사 기간(2015.6월~9월)을 훨씬 넘기고 있었다.

현충탑 안내문에는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며 “관리번호는 50-2-1”이다. “광주광역시 광주공원 관리사무소”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이 탑 안내 설명은 “이 탑은 1950년 6·25동란 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져 나라를 구한 광주 전남 지역 전몰 호국 용사 15,867명(군인 10,745명. 경찰 5,122명)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1963년 5월 29일 『우리 위한 영의 탑』이라 명명하여 건립한 현충탑이다.

이어서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이곳에서 호국영령들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추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우리 모두 경건한 마음과 단정한 몸가짐으로 경내에서는 질서문란행위를 삼가고 공중도덕을 지켜주기 바란다.”고 기록하고 있다.

▲ 심남일 순국 기념비
여기서 공원 노인복지관 방향으로 좀 돌아가 보자. 광주 공원복지관이 보이는 정면에 심남일 의병장이 의기 당당하게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심남일 의병장은 기념비는 국가보훈처 지정 시설물로 광주공원관리사무소에서 관리하며 관리번호는 50-1-8이었다.

심남일 의병장 비문 안내문에는 “이 비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전투에서 수많은 전과를 거두고 순국한 심남일 의병장의 뜻과 행적을 길이 전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심남일(沈守澤(심수택)1871~1910)은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강진. 퇴계원. 남평. 나주 등의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1909년 5월에는 안규홍 의병진과 합세하여 일군을 섬멸코자 하였으나 의병해산의 조칙이 내려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1910년 대구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곳을 찾으신 분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순국선열을 추모하고 주변정화에 협조하여 주기 바란다.”고 되었었다. 여기서 간략하게 기술하려고 했겠지만 언제 어디서 의병을 일으켜 언제 어디서 체포되었다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안타까웠다.

나는 광주공원을 산책하면서 일본의 잔학 무도한 침략때문에 가슴 아픈 슬픈 참상과 함께 한편으로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 되는 역사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 현장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정의롭고 민주적이며 평화적이 아니면 언젠가는 하늘의 벌을 받게 된다는 경험과 교훈을 배웠다. 광주공원은 그래서 인문학의 산실이요 보고다.

광주공원에서는 충효가 자신은 물론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지름길임을 선인들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인문학 교육장임에 틀림없었다. 광주공원은 가는 발길마다 충효의 길만이 자신을 단련시키고 슬픈 미래를 없앨 수 있는 선인들의 풍부한 경험에서 인문학을 만나는 것 같은 새로움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역사적 시행착오”로 민족의 슬픔과 교훈을 많이 배우고 익혔다. 광주공원은 민족의 슬픈 역사와 교훈, 그리고 광주 정신문화를 배울 수 있는 평생교육장으로 입지조건이 가장 적당한 곳이라 생각한다.

푸른 숲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잘 가꾸어진 녹음 속을 한 시간 반 동안 산책하는 동안에 곳곳에 정자가 있어 막걸리가 있다면 시상이 금방 떠오를 것 같았으나 해는 길손의 발길을 재촉하는 듯 서산에 뉘엿거려 발길을 재촉하는데 80객의 할머니를 만났다.

“무엇하고 계신가요?” 하고 물었더니 “나요. 운동하고 있어요. 아침저녁으로 운동 나와. 공원이 참 좋아요. 그런께 살기 좋은 동네여. 내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광주공원 덕분이여. 참 좋아. 사직동으로 이사 오랑께” 했다. 나는 “예 예 사직동이 참 좋습니다.” 했다.

▲ 박용철 김영랑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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