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류성룡과 <징비록> (2)
청백리 류성룡과 <징비록> (2)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5.09.17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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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599년 2월 안동으로 내려 온 류성룡은 두문불출하였다. 그는 옥연정사에 있으면서 찾아오는 손님을 사절했다. 1600년 1월에 류성룡은 옥연정사에 소나무를 심었다. 5월에는 대나무를 심었다. 서애가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은 뜻은 무엇이었을까? 송죽의 절개를 되뇌고 싶어서였을까?

이즈음 류성룡은 임진왜란 7년 전쟁 글을 썼다. 마침내 그는 1604년에 책을 탈고하였다. 책 이름도 당초에는 <난후잡록>이라 했는데 <징비록>으로 고쳤다. 7월에 서애는 <징비록> 서문을 직접 썼다. 여기에는 <징비록>을 쓴 사연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겪은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중략) 아! 임진년의 전화는 참으로 참혹했다. 수십일 사이에 한양 · 개성 · 평양 세 도읍을 상실하였고 팔도가 와해되었으며 임금이 피난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지금과 같이 평화를 되찾은 것은 하늘 덕분이다. (중략)

시경(詩經)에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 내가 그 잘못을 뉘우치려 경계하여 나무라고 훗날의 환난이 없도록 삼가고 조심한다.)” 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이 내가 <징비록>을 지은 이유이다.

백성들이 떠돌고 정치가 어지러워진 때에 나처럼 못난 사람이 나라의 중대한 책임을 맡아, 위기를 바로잡지도 못하고, 기울어지는 기틀을 바로 일으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시골에 눈 뜨고 살아서 구차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으니 어찌 나라의 관대한 은혜가 아니겠는가.
(중략) 이 일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신하인 내가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간절한 뜻과 나라에 보답치 못한 죄를 빌기 위한 뜻이 함께 담겨있다.

갑진년 7월 서애 류성룡 

한편 1600년 11월에 선조는 류성룡의 직첩을 돌려주었고, 1601년 12월에는 서용(敍用)의 명이 내렸다. 그러나 류성룡은 조용히 물러나서 말년을 보내도록 하여 달라고 선조에게 청하였다. 두 번 다시 중앙정치에 나서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

1601년 10월에 류성룡은 이원익과 함께 청백리로 뽑혔다. 영의정 이항복이 그가 부패 관리라는 무고를 씻어 주기 위해 추천하였다.

성호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의 ‘서애청백’글에서 류성룡의 청렴함을 적고 있다. 이 글에는 서애의 문인 정경세가 서애의 아들 류진에게 써 준 시가 있다.

하회 마을 집에 전해 내려오는 것이 서책뿐이니 河上傳家只墨庄
자손들 나물밥도 채우기 어려워라 兒孫蔬糲不充膓
십여 년 동안 정승 지위에 있으면서도 如何將相三千日
후손에게 물려줄 성도의 뽕나무 팔백 주도 없었던가. 倂欠成都八百桑

‘성도의 뽕나무 팔백 주’란 말은 촉한의 제갈공명이 임종 시 후손에게 남겨준 재산이 척박한 땅에 뽕나무 팔백 주란 데서 나온 말이다.
이어서 선조는 1604년 3월 관직을 복구하였으며, 7월에 호종공신 2등에 책봉하였다. 8월6일에 류성룡은 상소를 올려 공신록에서 이름을 삭제해 줄 것을 청했다. 그는 선조로부터 내려 온 모든 것을 사양한 것이다.

1607년 5월6일에 류성룡은 세상을 떠났다. 66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선조는 승지를 보내 조문하게 했고, 3일 동안 조시를 정지했다. 백성들도 슬퍼했다. 5월13일자 선조실록을 읽어보자.

3일 동안 조시(朝市)를 정지했다.
사신은 논한다. 도성(都城) 각 상점의 백성들이 빠짐없이 묵사동(墨寺洞)에 모여 조곡(弔哭)하였는데 그 숫자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묵사동에는 유성룡이 살 던 집의 터가 남아 있었다. 각 아문의 늙은 아전 30여명도 와서 곡하였다. 시민과 서리(書吏)등이 본가가 청빈하여 치상(治喪)을 하지 못할 것이라 하여 포(布)를 모아 부의(賻儀)하였다.

(중략) 시사가 날로 잘못되어가고 민생이 날로 피폐해지는데도 지금 수상(首相)된 자들이 모두 이전 사람만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추모하기에 이른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지금의 백성들 역시 불쌍하다.

그랬다. 조선 백성들은 불쌍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30년이 채 안 된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북쪽 오랑캐가 나라를 짓밟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인조 임금이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고두례를 하였다. 징비(懲毖)를 못한 탓이었다.

그런데 어찌 이 때 뿐이었을까. 1910년에 조선은 일본에게 망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못 이룬 꿈을 이룬 것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는 과연 ‘징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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