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을 돌다(4)
무등을 돌다(4)
  • 이종범 조선대 교수
  • 승인 2015.06.11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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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왜구를 물리친 빛나는 승전으로 최영의 홍산대첩, 최무선의 진포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꼽습니다. 홍산은 부여이며 진포는 군산이며 황산은 남원의 운봉입니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은 거대한 승리가 서남해, 진도 앞뒤의 바다에서 있었습니다. 경렬사에 모신 정지 장군이 이끌었습니다. 이리 보면 왜구는 호남에서 치명적 타격을 당한 셈입니다.

1347년(충목왕 3) 나주에서 태어난 장군은 '고려사'에 따르면 ‘독서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찍부터 해전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해도원수의 칭호를 얻었고, 경상도 남해에서도 대승을 거둔 기세를 몰아 대마도 정벌까지 주창하였지요. 물론 해전만이 아니라 남원ㆍ옥과 등 내륙에서도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혁명과 건국의 과정에서 정치적으로는 어리숙하였습니다. 위화도 회군공신이 되긴 하였지만 우왕복위사건에 연루되고 명나라로 도망간 자들의 거짓 입질 때문에 두 차례나 유배 살고서 망월동 분토마을로 내려와 45살의 생애를 마쳤던 것입니다. 묘소 아래 지금 경열사가 있습니다.

장군의 9세손인 정충신도 경열사에서 제사를 받고 있습니다. 1576년 광주 향교동에서 태어난 정충신의 일생은 장엄한 드라마입니다. 연보에 의하면 소년 시절 늙은 기생집에서 살며 강진에 있던 병영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는 관아의 심부름을 도맡던 통인으로서 광주목사 권율을 따라 전장에 나서 적정을 살피는 정탐을 제대로 해냈습니다.

그리고 7월 초순 전라도를 압박하던 왜군을 진안 웅치에서 막아냈던 승전보를 임금이 피난한 의주 행재소의 병조판서에게 전달하였습니다. 당시 병조판서는 목사의 사위인 백사 이항복이었습니다.

백사는 통인의 능숙함과 의젓함을 아끼며 틈틈이 배움을 베풀었고, 통인은 무과 급제로 보답하였습니다. 이때가 17살, 백사의 막료로 시작한 무인의 길은 순조로웠습니다. 광해군 치세 한동안 광양 섬진강변에서 공백기를 보냈지만 아시아의 풍운이 눈앞에 닥치는 현실에서 요직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정묘호란 때는 부원수가 되어 후금의 진군을 막아섰고, 이후에는 신흥제국과의 마찰을 줄이면서 산성을 축조하고 군비를 마련하며 병사를 보살피며 훈련시켰습니다. 그러다가 깊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여섯 달 후 병자호란이 일어났습니다.

정충신은 천문과 의약에도 능통하고 문장이 넉넉하였습니다. 󰡔만운집(晚雲集)󰡕이라는 문집을 남겼으니 무인으로서는 드문 일입니다.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은 정충신을 ‘무등인’으로 높였습니다. “서쪽에서는 나라의 빗장을 쳤던 관서의 명장이요, 남쪽 북두성 저편 남도의 무등인이로세.” 그리고 삼한 백성 즉 온나라 사람의 제사를 받을 것임을 확신하였습니다.

정충신은 어느덧 무등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동복 현감이던 부친을 찾으며 광주를 지났던 다산 정약용이 품었습니다. “거듭 광산을 지나갈 때마다, 가슴에 정금남을 품네. … 옛 사당엔 풍운의 기운 서렸고, 남은 터엔 어른들이 전설을 전하누나. 웅장할 사 서석의 진산, 정기 모아 기남자 탄생시켰네.”

금남(錦南)은 이괄의 난을 막은 공훈으로 받은 봉호, 금남로의 유래가 여기에 있습니다. 금남로는 오월 광주의 차별을 넘어 죽음을 넘어 시대의 빛을 뿜어냅니다. 보잘 것 없는 백성이었지만 강퍅한 세월을 이기고 싶어 불끈 솟았던 정충신! 오늘에 태어났으면 민주주의여! 하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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