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어던]의 깊은 슬픔이 소름 돋는 공포로 엄습해 왔다.
@[리바이어던]의 깊은 슬픔이 소름 돋는 공포로 엄습해 왔다.
  • 김영주
  • 승인 2015.04.16 2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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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어던Leviathan에는 두 가지가 있다. 성서의 욥기에 “아무도 이길 사람이 없어서 보기만 해도 뒤로 넘어지고, 건드리기만 해도 사나와져서 아무도 맞설 수가 없다. . . . 모든 권력자들이 쩔쩔매는 ‘왕중왕’이 여기에 있다.”는 리바이어던이 있고, 홉즈의 저서 [리바이어던]에 “사람들은 이기심 덩어리여서 그대로 내버려 두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으로 온 세상이 아수라장이 된다. 그러니 사람들이 자기 이기심의 일부를 떼어내어 그걸 모아서 ‘사회계약’이라는 공권력으로 합의한 조직체(Assembly)에 절대복종할 권력을 주어야 한다.”는 리바이어던이 있다. 이 두 가지는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앞의 ‘왕중왕’은 신분서열을 바탕으로 한 왕권신수설의 ‘절대군주론’이 느껴지지만, 뒤의 ‘절대복종할 국가’는 근대 시민의 만인 평등을 바탕으로 한 ‘시민국가론’이다. 홉즈의 리바이어던은 영어로는 Common-wealth를 뜻하고 라틴어로는 Civitas를 뜻하는 이념을 추구하는 합의체이다.( 홉즈의 ‘근대 시민국가론’은 나중에 Big Government를 추구하는 사상과 Small Government를 추구하는 사상으로 나누어진다. 그 Big Government 사상과 Small Government 사상은 다시 수없이 다양한 변형을 낳는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근대철학의 탄생으로 보듯이, 홉즈의 [리바이어던]을 근대 사회과학의 탄생으로 본다. 그 수많은 변형을 가장 간단한 유형으로 정리하면, 보수적인 ‘보수파와 집단파’ 그리고 진보적인 ‘민주파와 사회파’이다. 너무 간단해서 무리가 있지만, 개수를 더 늘리면 복잡해진다. ) 


 
성서의 욥기에 나오는 리바이어던을, 상상그림에 드래곤 모습을 한 괴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인지 리바이어던이라는 용어를, 사람들은 홉즈가 꿈꾸었던 ‘올바른 시민국가’가 아니라 괴물처럼 무서운 ‘국가 공권력의 폭압’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굳이 따져 말하자면, 리바이어던이라는 낱말에는 ‘국가 공권력의 폭압’이라는 뜻까지 합쳐서 세 가지가 있는 셈이다. 이 영화도 이 세 번째 모습으로 ‘공권력의 폭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폭행자는 시장과 공무원만이 아니다. 러시아의 동방정교회의 늙은 신부가 시장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몇몇 장면 그리고 주인공들과 조연들이 일상생활에서 서로 밀고 당기는 갈등 장면으로 또 다른 폭압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걸 보여준다. 후반부에 남자주인공과 그 신부 사이에 오가는 대화 그리고 그 신부가 미사설교하는 마무리 장면이 남자주인공에게 희망 쪽으로 나아갈 지 절망 쪽으로 나아갈지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설교가 끝난 뒤에 시장과 건설업자가 성당을 나오면서 나누는 대화로 미루어보건대, 절망 쪽으로 가는 듯하다. 그러니까 ‘리바이어던의 폭압’이 공권력뿐만이 아니라, 시민의 일상생활 그리고 종교에까지도 함께 두루두루 얽히고 설켜서 그 지역 전체를 암울하게 짓누르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러한 ‘리바이어던의 폭압’을, 풍자나 비유보다는 맨 얼굴을 그대로 내보여주는 리얼리즘으로 연출하니까, 그 스산한 어둠이 더욱 깊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초반에는 그저 흔하게 만나는 공권력의 횡포이려니 덤덤하게 바라보았는데, 갈수록 감당하기 힘들어지더니 마무리즈음에는 소름이 돋도록 섬뜩하였다. 리얼리즘을 사실주의라고 번역하는데, 이 용어는 “이 세상의 만물과 만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작품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뜻만으로는 그 특징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작품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기도 하지만 풍자나 비유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리얼리즘의 특징은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는 점에 있다기보다는 “이 세상의 ‘어두운 그늘’에 주로 관심을 준다.”는 점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리얼리즘 작품은 이렇게 분위기가 슬프고 어둡고 무겁기 때문에, 대중들은 재미없어하고 부련해한다. 진보적 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아서 화제가 되기도 하지만, 관객은 거의 모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작품들 대부분이 ‘저주받은 명작’이 된다. 이 걸작의 깊은 슬픔에 감동하여, 그의 다른 작품 [추방]을 찾아서 만났다. 역시나 슬프고 어둡고 무겁다. 이 작품 또한 걸작이지만, [리바이어던]의 작품성에 조금 더 높은 점수를 준다.

<예고편>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VideoView.do?movieId=85973&videoId=47219&t__nil_VideoList=thumbnail
 
우리나라에서 이창동 감독의 작품이 매우 그러한데, 이창동 작품보다 ‘있는 그대로’의 맨 얼굴을 더욱 더 그대로 드러내어 연출했다. 처연하게 스산한 아름다움이 참 깊지만, 그게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기 때문에 심장이 칼날에 베이고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해서 마음만 다치는 게 아니라 몸까지 아파온다. 포스터에 쓰인 대로 무섭지만, 공포스러워서 무서운 게 아니라 슬픔이 너무 깊어서 무섭다. 아니 그런 세상이 우리의 주변에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미치자 그 깊은 슬픔이 소름 돋는 공포로 엄습해 온다. * 대중재미 D0(내 슬픔 A특급), * 영화기술 A특급, * 감독의 관점과 내공 : 강한 사회파 A특급. 그래서 ‘저주받은 특급명작’이다.

▶◀ 세월호 비극의 1주년을 맞이하여, 그 미어지는 슬픔이 소름 돋는 공포로 변하지 않기를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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