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을 돌다(2)
무등을 돌다(2)
  • 이종범 교수
  • 승인 2015.04.16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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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 조선대 교수
지난번 무등산이 웅장하고 포근하게 보이는 극락강과 황룡강이 만나는 서창 절골에서 1474년 태어난 눌재 박상을 잠깐 소개하였습니다. 오늘은 눌재가 무등산을 어떻게 풀었는가를 엿볼까 합니다. 눌재의 올곧은 기상을 되새기며 시작하겠습니다.

연산군의 광란이 절정을 치닫던 1506년 8월 중순, 전라도의 명망 있는 몇 배객과 옥과현감 김개가 진성대군을 옹립하고자 각처에 통문을 보내서 반정의병을 모을 때였습니다. 당시 전라도사-오늘날의 행정부지사로 봉직하던 눌재도 모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장성 출신이던 김개와는 1501년 나란히 문과에 들었던 절친한 벗이며 홍문관의 동료였습니다.

이러한 일촉즉발의 시점에 눌재는 제 딸이 연산군의 기고만장한 애첩임을 믿고 온갖 패악을 저질러도 누구도 다스리지 못한 우부리를 나주 금성관으로 잡아들여 거칠게 매질하여 목숨을 거두어 버렸습니다. 이른바 우부리장살사건! 일도의 이목이 휩쓸리는 사이 반정계획은 착착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받으리라 당당하게 올라가는 눌재의 모습도 뭇 사람의 찬사와 탄식을 자아냈습니다. 그런 사이 남도의 통지를 받은 한양의 반정세력이 서둘러 궁궐을 장악하면서 중중반정은 성공하였습니다만, 기실은 전라도가 추동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여기에서 눌재의 공로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눌재는 1515년 가을 담양부사로 있으면서도 이웃의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정국을 바꾸는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연산군의 처남이며 마지막 영의정인 신수근을 처단한 반정공신이 중종의 조강지처 신씨가 신수근의 딸임을 내세워 쫓아냈던 죄악을 추궁하고 훗날의 인종을 낳고 세상 떠난 장경왕후를 대신하여 신씨를 중전으로 삼자는 신씨복위소를 올린 것입니다.

임금부터 인륜을 지켜야 좋은 정치를 기대할 수 있다는 주장은 광범한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이 때문에 눌재와 충암 김정은 유배형을 받았지만 조광조 등의 기묘사림이 부상하며 혁신정국이 열리게 됩니다.

1519년 모친상 지내고 광주에 있던 눌재는 그해 겨울 기묘사화로 능주로 쫓겨온 정암 조광조를 무등산 넘어가는 분수원(分水院)에서 마중하였습니다. 고려 말 광주를 지나는 물길이 너무 세서 물을 나누기 위하여 돌을 쌓아 물길을 둘로 나누었다는 유래가 있는, 요즈음 양림동과 방림동 근처의 고을 숙소였습니다. 그리고 한 달도 되지 않아 눈보라 치던 날 정암은 사약을 받았지요. 이듬해 봄, 용인 심곡리 선영으로 가는 정암의 상여 앞에서 눌재는 오열하며 만사를 올렸습니다.

만사는 하늘로 올라가는 혼(魂)과 지하로 가는 백(魄)을 마지막까지 붙잡겠다는 노래인지라, 오롯한 사연과 아련한 감정을 담기 마련입니다. 거푸 칠언절구 두 수를 지었는데 다음은 첫 수입니다. “무등산 길목에서 작년에 손을 잡았는데, 상여 실은 수레가 쓸쓸히 고향 돌아가네. 훗날 저승에서 만나리니, 지금 인간만사 시비를 말한들 부질없으리라.”

그리고 두 번째를 이렇게 마감합니다. “잠깐이면 황천인데 아무런 차등이 없을 것이네[纔到九原無等差].” 제가 이 시를 굳이 소개하는 이유는 눌재와 정암의 애끓는 사연이 안타까워서이기도 하지만, ‘무등산(無等山)’으로 시작하여 ‘무등차(無等差)’로 끝나는 발상이 너무 좋아서입니다. 차등이 없는 세상, 평등의 나라를 꿈꾸는 무등산! 광주정신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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