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을 돌다(1)
무등을 돌다(1)
  • 이종범 조선대 교수
  • 승인 2015.03.19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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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범 조선대 교수

무등산에는 길이는 수십 보(步)가 되고 높이는 백여 척이 넘은 바위덩이가 성벽처럼 있습니다. 무늬는 마치 물결 같고 구름 같으며 희고 붉은 색들이 섞여 있습니다. 주상절리대(柱狀節理帶)입니다.
그런데 날이 가물다가 비가 오려거나 장마가 지다가 날씨가 개려고 하면, 소리가 울려 수십 리 밖까지 들렸답니다. 일기예보를 한 셈입니다. 그래서 상서로운 산 서석산(瑞石山)이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옛 백제 시대 사람들은 무등산곡(無等山曲)을 불렀답니다.

지금은 전하지 않습니다만, 무등산에 산성이 생겨 편안하게 살았다는 기쁨의 노래랍니다. 무등산은 멀리 보면 아늑하고 포근합니다. 황룡강과 극락강이 만나는 광주의 서쪽, 그래서 이곳의 고을 창고를 서창(西倉)이라고 하고, 나루를 시양나루라고 하였는데, 시양을 ‘쇠’로 읽고 철포(鐵浦)로 적은 학자가 있었습니다.
명종 즉위 직후 문정왕후와 외척이 세도를 부리면서 일으킨 을사사화로 진도로 유배 왔던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었습니다. 훗날 선조 치세 영의정까지 오른 사림정치가였습니다. 지금 비행장이 있으니 절묘합니다.

그런데 서창 넘어 본덕동에 1528년 문과 들고 쉽게 벼슬을 마감한 설강(雪江) 유사(柳泗, 1502∼1571)가 호가정(浩歌亭)을 조성하였는데, 여기에서 보면 오르는 사람의 무등산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무등산이구나, 할 것입니다.
왼쪽으로 어등산이 보이고 남으로 나주 금성산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암 월출산도 보인다고 합니다. 마음으로 보면 무엇이 아니 보이겠습니까만, 무등산이 가운데에 있습니다.
무등산을 찾고 아끼고 사랑하신 분이라면 무등산을 노래한 옛사람의 글이나 시를 알고 계시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많은 기행문이 있습니다. 근래 김대현 교수의 책임번역으로 광주민속박물관에서 ‘무등산유산기’를 발간하였습니다. 시는 이보다 훨씬 많습니다.

여기에서는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을 소개하지요. 세자가 조카 임금에게 왕위를 빼앗고 죽이자, 공자의 어질 인(仁)을 배운 나라가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분개하고 좌절하며 방랑의 길을 나섰던 그 분입니다. 다섯 살 때로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사실 여덟 살에 세종이 불러 상품을 내린 천재였지요.
무등산에 올랐습니다. “울창한 산 빛깔이 푸르스름한 아지랑이에 잠기면, 너덜겅 돌밭 샛길 늘푸른큰키나무에 그늘이 지네. 신사와 불당의 많은 나무 무척 높은지라, 하늘조차 가까워 손으로도 별들을 더듬을 수 있겠네.”
그리고 가장 높은 규봉사에서 올라가서는 맑은 바람 낙엽송 향내에 내려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헌걸차게 왔다가 반시(半時)만 머물다니, 차마 선방을 내려가지 못하겠네.”

매월당의 시문이 들판에 너부러질까, 물에 잠길까 걱정하며 모았던 분이 있었습니다. 눌재 박상(1474∼1530)인데 1520년대 충주목사 시절이었습니다. 무섭도록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사림학자로 광주 서창 절골 출신입니다.
일찍이 강호시단을 세운 면앙정 송순이나 유명한 시인으로 해남 출신인 석천 임억령을 가르쳤는데, 세상 떠나기 직전에 찾았던 하서 김인후의 기억은 오롯합니다. ‘별다른 가르침이 없었어도 격절한 언론과 정숙한 거동에 절로 양심이 열리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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