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올여름도 틀렸어...
지리산, 올여름도 틀렸어...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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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중의 백화제방-지리산 콤플렉스
- 이성부 시집, {지리산}, 창작과비평사.



지리산엘 마지막 올랐던 게 언제였던가? 승용차로 하동이나 남원, 혹은 구례 어디 콘도에 하룻밤 짐을 풀고, 초저녁부터 마신 복분자술이며 더덕술에 잔뜩 취해 노래방에나 기웃거리다 돌아오는 그런 등산 말고 말이다. 아마 87년 초여름 어디께가 아니었나 싶다.

모두 기억한다. 그리운 이름들. 균, 오, 천, 기, 애, 숙, 진, 연, 자, 희……. 같이 부르던 노래며, 나누던 말들, 좁디좁은 텐트 안에 잘도 구겨져 잠들던 표정들을 다 기억한다. 사흘을, 먹는 시간 외에는 줄곧 오르고 내리고 뛰고 걸었으면서도, 밤마다 다들 늦게까지 잠들지 않고 울었더랬다. 피곤해서가 아니었을 것임은 그 즈음 젊은 나이로 지리산에 올라 본 사람들은 다 안다.

이제는 낯부끄러워 말하기 쉽지 않지만, 그 시절에 지리산은 그냥 오르는 산이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 다녀와서는 다들 전사라거나 투사라거나 하는 묵직한 호칭을 제 몫으로 감당해야만 하는 그런 산이었으니, 아마도 주체할 수 없는 젊음에 불콰한 술기운, 그리고 능성이 하나 계곡 한 줄기에도 묻어 있다던 선혈이 낭자한 역사의 무게, 민족의 공업(共業) 같은 말들의 중압감이 눈으로 펑펑 흘러 나왔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즈음도 더러 지리산엘 다녀오겠다며 훌쩍 떠나는 사람들을 본다. 부럽고 서글프다. 이제는 무등산 중봉도 벅찰만큼 느리고 둔하게 변해 버린 몸뚱이 때문이기도 하고(나이에 비해 내 몸은 너무 일찍 노쇠해버렸다), 향수 때문이기도 하고, 뱀사골에 빠져죽은 고정희 시인이 떠올라서이기도 하고, 등등. 하여튼 산 이름만 들어도 착잡해지는 게 지리산이다. 바야흐로 장마비만 그치면 휴가철이니 또 한 차례 지리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생겼다.

올여름도 그 곳에 오르지 못할
이 도시의 장삼이사들이여!
'160쪽 높이' 산에 오르자
등산후유증도 각별히 조심!


그런 저런 생각을 하던 차여서 일까? 이즈음에 읽은 책들에 등장하는 산들이 모두 지리산처럼만 여겨지는 것이었다. 가령, 김성동의 '꿈'에 등장하는 방장산, 반야 보살과 파계승 능현이 현실의 군대를 피해 수행차(사실은 사랑차) 토굴을 찾아 떠난 바로 그 산도 지리산처럼만 여겨졌다.

반야봉이나 천왕봉과 같은 익숙한 이름들이며, 산골짜기마다 떠도는 빨치산의 원혼 운운, 지리산에 틀림없었다. 또 있다. 복거일의 소설 '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에서 주인공의 딸이 쓴 아름다운 동화에 등장하는 마법산 또한 지리산처럼만 여겨졌다. 시간의 압제를 이기는 마법을 줄 수 있는 산이라면 아무래도 이 땅에 지리산 외에는 없어 보였던 것이다. 이쯤되면 지리산 콤플렉스라 불러도 과장은 아니겠다.

그러던 차에 이성부의 새 시집 '지리산'을 만났다. 모두가 지리산에 관한 시들이었다. 어떤 시에서 시인은, '어린 시절 짝사랑했던 가시내가 커서 당골네 되었다는 소문을 떠올리며 백무동 골짜기'(백무동)를 내려가고 있었고, 어떤 시에서 시인은, '산 좋아하는 젊은 남녀가 약혼여행 삼아 지리산으로 들어왔지요 이십여년 전 일입니다 여기 어디쯤 편편한 곳에 텐트를 치고 물도랑을 만들고자 흙을 팠습니다 한참 파내려가던 사내가 그만 기겁을 한 채 허둥지둥 산을 내려가버렸습니다 놀란 아가씨가 흙 파던 자리를 살펴보니 사람의 뼈가 솟아 있었지요 벼엉신 나를 두고 저만 혼자 도망가?'(피아골 산장에서 들은 이야기)하면서 피아골 산장에서 들은 이야기를 조단조단 들려주고 있기도 했다.

옳다꾸나! 싶었다. 지리산에 오르지 못할 처지라면 이 시집에나 오르자! 싶었다.
바보같은 자기 위안임에 틀림없지만, 사실 올 휴가철에 지리산에 오르고 싶어도 못 오르는 이들이 어찌 나 뿐일까? 그러니 지리산 콤플렉스를 가진, 하지만 올해에도 영영 지리산엘 오르긴 틀렸다 싶은 이 도시의 장삼이사들에게 권한다.

7천원에 160쪽 높이의 지리산에 한 번 올라보시라. 단 얕잡아 보지는 말아야 할 것이, 일단 오르기 시작하면 이 산도 시인의 연륜만큼이나 골이 깊고, 영(嶺)은 멀 수도 있다. 등산 후유증에 각별히 신경을 쓸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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