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친일 아리랑을 읊는다(11)
다시 친일 아리랑을 읊는다(11)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5.01.29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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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고문

안규용과 안규홍의 삶을 함께 살펴보는 것은 시대를 대처하는 사람들의 다른 대응과 지식인과 농민의 대응이 달랐던 것을 그 편린이나마 엿볼 수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안규홍은 1984년 시인 문병란이 “동소산의 머슴새”라는 장편 서사시로 세상에 알린 한말 호남의 대표적 의병장이었다.
안 담살이로 불리었던 그는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의협심이 강하고 용기있는 청년으로 알려졌다. 을사 보호조약으로 한국의 예속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일본 상품이 대량 유입되고 일본 농어민의 대량 이주가 진행되어, 뜻있는 농민들이 우려하는 상황에서, 그의 삶을 전하고 있는 ‘담산실기’에 의하면 “을사년 10월의 변고를 듣고 항상 개탄하였는데, 깊은 밤에 잠을 자지않고 천장을 쳐다보며 앉기를 여러번, 함께 자던 사람이 그를 위로하여 세상이 되는 대로 살자고…, 그럴 때면 공은 멍하게 앉아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한숨만 길게 내쉴 뿐”
이러한 과정에서 결단을 내려 거사에 나서는데, 1909년 1월 9일자 ‘신보’의 ‘머슴군 의병’에 의하면 “거년 9월에 근처에 있는 머슴군 백여명을 모집하여 연설, 우리가 남의 집의 머슴이나 국민되기는 일반인데, 나라 일이 위급할 때를 당하여 농가에서 구차하게 살리오 하고 의병을 창기”하였으나 유생들은 그가 중망이 없다하여 함께 일을 도모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독자적 기병을 포기하고 조계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강용언 부대에 투신하여 부장이 되었다. 이어 탐학행위를 자행한 강용언을 제거한 안규홍은 곧바로 의병대장에 추대되었고 1908년 3월경에는 상당한 규모의 조직을 갖춰 동소산에서 봉기하였다.
그의 부대는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이르는 청장년층으로 왕성한 활동력을 담보하였고 지주 유생 농민 해산군인 머슴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지만 토착농민이 중심인 평민 의병부대였다. 이들의 활동방향은 탐학한 관리와 그 주구를 근절하고 친일세력을 처단하고 일본인 구축을 목표로 삼았다.
안규홍은 의병의 민간인 침탈행위를 일절 금지하여 일제측 자료에도 “‘엄히 부하의 비행을 단속하고 약탈을 금하며 오로지 한민을 선동하여 폭동의 영속, 도당의 강화에 힘쓰는 듯하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그는 후원자의 숨은 협조를 비롯하여 세금 탈취, 농민들의 자발적인 도움, 각 면장들로부터 거둔 군용금 등을 재원으로 삼아, 건강하고 안정된 게릴라의 면모를 갖추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안규홍 부대의 항일투쟁은 그의 고향인 보성을 주 무대로 하고 화순 순천 광양 장흥 강진 등에 미치고 있었는데, 근거지는 광양군 백운산중이었다.
그들의 공격대상은 일본의 헌병대. 수비대. 순사대 토벌대로 일본에서 이주해 온 어민들도 예외는 아니고 일진회 역시 처단 대상이었다. 재래식 무기와 탄약을 자체로 직접 제작 조달하기도 하고 대포와 서양식 신무기도 가지고 있어 그 화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제는 무력진압과 유화책을 병행하다 1909년 4월 하순부터 2개 대대를 동원하여 안규홍부대 섬멸작전에 임하였다. 호남의병의 연합작전도 펼쳐져 일제의 진압작전에 대응하였다. 일제는 1909년 6월에는 변장정찰대를 편성하여 의병 근거지를 수색하여, 전남지방의 의병을 발본색원하기 위한 남한폭도대토벌 작전을 시작하였다.
일제의 집요한 토벌에 안규홍 의병부대는 해산하기에 이르렀고, 그 이후 9월25일에 부장 염재보와 함께 체포되고 결국 일제에 의해 1911년 순국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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