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친일 아리랑을 읊는다(10)
다시 친일 아리랑을 읊는다(10)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5.01.22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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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용은 합방 이듬해 그가 8세 때 이사한 원봉촌에서 강학을 시작하여 여러 지역의 문하생들이 찾아와 공부하였다. 1920년에는 집 앞 가까운 곳에 왜인들의 신식학교가 세워지자 보성군 복내면 월량동에 새 터전을 마련하여 죽곡정사라 이름하고 독서당으로 삼았다. 이곳에서 약 200명의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1934년에 왜경의 간섭으로 문하생들을 해산한 뒤, 8월에 지리산 문수동 계곡의 해발 800m 지점에 서산초려를 짓고 은거를 시작하였다. “오랑캐와 금수의 재앙이 더욱 매서우니 산이 더 높지 않고 물이 더 깊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 …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결국 깊은 산의 초목과 함께 썩어가니 스스로 가련할 뿐이다”고 당시의 심경을 술회하고 있었다.
안규용의 문인 박규현이 서울 남산에 올라 ‘선왕의 도읍이 모두 오랑캐와 짐승의 놀이터가 되었으니 눈뜨고 못 보겠다.’는 일기의 글이 빌미가 되어 40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일찍이 ‘조수동근설’을 써서 새와 짐승과 더불어 사는 것이 결신이라고 극단적으로 말하기도 하였디. 하지만 선비는 도덕과 인의를 천명하는 사람으로 원대한 안목과 용맹스런 의지로 값진 마음과 경륜을 가슴에 품고서 우주의 중간에 우뚝 선다면, 그 존귀함은 대적할 것이 없고 위대함은 견줄 것이 없다고 강조하였다.
1924년에는 ‘향례합편’을 간행하여 선왕의 제도와 문물을 보존하고자 하였다. 그는 한 때 노사 문인과 연을 맺기도 하였으나 송시열의 도학이념을 계승한 송병선과 송병순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노론의 기호유학의 맥에 닿아 있었다. 송병선·병순 형제는 망국으로 자결하여 도학의 엄격성을 보여 주었지만, 대부분의 노론 주류는 망국은 수용하였던 듯싶다.
이덕일의 조사에 의하면 송시열을 비조로 하는 노론은 합방 당시 76명의 수작자 중 56명을 차지하였다. 대명 의리의 유학자들에게 나라는 망했어도 아직 도학을 일으킬 가능성은 있었던 것이다.
국가를 지배계급의 이익실현 도구로 본 레닌에게 혁명이 국가에 우선한 상위 개념이듯, 도와 대명의리가 우선할 수 있어 순국하지 않고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변명의 실마리로 가능했겠지만, 그들의 생활공동체 문화공동체, 민족공동체가 결딴나는 마당에, 도학과 대명의리로 망국의 현실을 해소시키는데 어찌 이율배반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 쿠데타정권의 근대화 작업에 함께 신명을 내서 설쳐댈 수 없는 것은 가치의 이율배반감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과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금수와 어울리는 첩첩산중의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술과 대화로 그의 삶을 눅이지 못했다면, 그의 도학의 연찬도 어렵지 않았을까?
문수동 시절 그의 서산초려를 살아서 들어가는 무덤이라는 뜻의 생광이라는 처절한 표현을 썼던 것이 도(道) 실천의 마당을 상실한 자의 아쉬움과 순국도 저항도 접어버린, 그러나 망국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이율배반에 몸부림쳤을 안규용 선생의 심통이 선연하다. 그렇지만 강상을 무너뜨린 금수에게 굴복하고 금수와 어울릴 수 없는 조선 선비의 무너지지 않았던 자의식이 대견하면서도, 도학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무서운 힘을 발휘함을 목격하게 된다.
안규용과 같은 보성 출신으로 같은 안방준의 10세손인 안규홍은 혁혁한 의병대장으로 한말 호남 의병사를 장식했다. 그는 빈농 출신으로, 일면 도학이라는 호신부가 없어서 이율배반의 생광의 고통은 면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고뇌 끝에 결단하고 그 결단을 실천해 가는 안규홍의 삶을 엿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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