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친일 아리랑을 읊는다(7)
다시 친일 아리랑을 읊는다(7)
  • 이홍길
  • 승인 2014.12.31 16: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12월 19일 헌법 재판소는 논란 속에 국민의 관심을 모았던 통합진보당의 해산을 선고하였다. 광주의 시민 사회단체들은 헌재가 정당해산의 근거로 삼은 ‘내란을 논의하는 회합’은 이석기 의원의 2심 재판에서 무혐의로 판결났기 때문에 언어도단임을 성명하였다.

아울러 진보당 해산 선고를 정치 모략행위로 간주해, 비선실세 국정농단이 드러난 정윤회 게이트를 잠재우기 위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12월 29일에 열린 ‘광주 민주원로 송년시국선언’에서는 헌재의 정당해산을 정당 민주주의의 기본원칙과 집회결사의 자유를 짓밟는 처사로 ‘역사가 주는 교훈 앞에서 미래의 준엄한 심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보았다.

법은 엄정한 것으로 알고 기대하는 많은 한국국민들을 실망시키고 좌절하게 하는 현대 한국 법의 역사가 궁금하다. 세계사적 법의 전통에서 비껴난 한국의 법은 그 봉건성과 식민성을 극복하는 데에는 아직도 그 역사가 일찬한 모양이다.

‘네 죄는 네가 알렸다’는 호통과 고문 속에 드러나는 봉건시대의 법 운용이 멀지 않은데다 식민법으로 출발한 한국의 근대법이 권력의 시녀성을 면키 어렵게 했을 것이다. 봉건 왕조시대의 법은 치지도외(置之度外)하고 근대법의 출발을 살펴보기로 하면, 일제는 1905년의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통감 통치를 출발시키고 헤이그 밀사사건을 꼬투리 삼아 1907년 고종을 퇴위시키는 정미7조약을 강박하여 통과시켰다.

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여론에 호소하려다 실패한 헤이그 밀사사건을 적반하장 격으로 트집 잡아, 그들의 친일주구들을 동원하여 내각회의를 열어 황제의 양위를 강박했다. 표면적으로는 일본이 아닌 대한제국 정부가 스스로 결정한 것으로 하기 위해서, 일본 외무대신은 고종을 알현하고, 한국 각료 일동은 양위를 주청하고, 이완용과 송병준은 고종의 양위만이 직면한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임을 강권하였다.

심지어는 이완용은 황제에게 자결을 촉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친일의 대신들과 친일의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그들의 황제를 내치기 위한 추태를 벌리고 있었다. 대신들이 고종의 양위를 재촉하는 그 시간 일진회는 궁 밖에서 촛불시위를 벌였다.

일진회 일지에 의하면 부회장 홍긍섭의 지휘 아래 ‘일반회원 300여명이 모여서 15명씩 짝을 지어 촛불을 켜들고 궁궐을 돌면서 양위를 재촉’했다고 한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 했던가! 국리민복을 위한 도구여야 할 내각회의가 제 나라 임금을, 외국을 위해 내쫒는 도구가 되고, 먼 훗날 대한민국에서 민주화를 드높이고 인권을 선양한 촛불시위가 친일 매국의 대중행동의 효시였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함을 금할 길이 없다.

도구를 탓할 수는 없고 그 담지자가 문제임을 새삼 깨닫는다. 고종을 양위케 한 정미7조약은 시정개선 법령제정과 행정처분 등을 통감의 승인사항으로 만들었다. 통감 이토와 이완용 사이에 조인된 ‘비공개 각서’는 ①대심원·공소원·지방재판소를 신설하고 형무소 소장에 일본인을 임명하는 것 등의 사항이 있었고 7월 27일에는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신문지법을, 29일에는 보안법을 공포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여론과 행동을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보안법의 역사가 이처럼 유구함에 새삼 놀라고 여론과 행동을 지배하기 위한 필요는 꼭 식민지가 아니어도, 권력을 배타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는 기득권 세력이 있는 한, 갖가지 명분과 외양을 갖추고 존재했음을 한국 현대사에서 아프게 실감했음을 밝혀둔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