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친일 아리랑을 읊는다(2)
다시 친일 아리랑을 읊는다(2)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4.11.27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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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고문

일제의 수탈을 부정하면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마냥 정당화하는 인사들을 위해서, 1940년대에 있었던 일본 요인들의 좌담회를 소개한다. 1940년의 [모던일본] 조선판은 “조선의 어제와 오늘을 이야기하는 좌담회”를 싣고 있었다.
좌담회는 귀족원 의원과 은행의 이사와 정부의 국장 등 10명이 모여 조선의 어제와 오늘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과 오랜 인연을 갖고 있어 조선고추파종공업의 사장이면서 귀족원 위원인 ‘아루가 미쓰토요’는 이토통감시대부터 조선에 왕래하고 있었고, 중앙조선협회 이사인 ‘유게 고타로’는 한국병합 이듬해부터 왕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에 영주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야 할 것을 이야기하고 쌀 증산을 말하고 있었다. “조선”이라는 소설을 쓴 ‘다카하마 고시’는 무단정치로 이름난 ‘데라우치’ 총독을 배려가 아주 깊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조선> 소설 속에서 배일을 한 나라는 결국 망하고 일본과 손을 잡은 민족은 점점 번영한다는 것을 조선인의 입으로 말하게 한 대목같은 것은 정말 그대로인 것을 다짐하는 대화도 있었다.
중앙협화회 이사이면서 귀족원 위원인 ‘시모무라 가이난’은 만주사변 중일전쟁 세계대전 등이 발발하는 것을 보고 대만이나 조선 기타의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미약한 힘으로는 독립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을 말했다. 또 어떻게 하면 진정 서로 손을 맞잡고 나아갈 수 있는가가 문제임을 지적하면서 인종이 같으니 서로 융합하는 속도를 더 내야함을 주문하면서 2,3천만 정도의 힘으로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척무성 관리국장인 ‘소에지마’는 시모무라에 동조하면서, 조선사람 몇 사람이 찾아와서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만약 일본이 패했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말하면서 틀림없이 처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을 것을 말하고 어떻게든 철저히 일본사람이 되어 이번 중일전쟁에서도 황국신민의 한사람으로 있는 힘을 다해 국책수행에 기여할 것을 다짐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었다.
덧붙여 경성에 있는 지원병 훈련소의 높은 성과와 노동자 징용 결과가 좋은 평판을 얻고 있음도 말하였다. 미쓰비시지사 대표이사인 ‘아카호시 리쿠지’는 병합 당시 일본에서 지주나 부호들이 몰려 들어와 동양척식회사하고 손잡고 토지를 사들이거나 미개한 땅을 개척했음을 말했다. ‘시부사와’는 솔선하여 한국흥업을 세우고 광주에 본거를 두었고 ‘이와자키’ 가문도 약 5천 정보의 전답을 매수했고 ‘스미모토’도 그러했음을 말했다.
‘아루가’는 부연 설명하면서, 그 당시 조선 땅에 눈독을 들인 사람은 모두 성공, 대성공했음을 지적하고 조선인이 수백년 전에 개간하여 일구어온 토지를 싸게 사들여 그냥 경영만 했음도 말하였다. 조선인의 토지를 매수하지 않고 새로운 토지를 개척한 사람으로 후지흥업회사, 조선개척회사 등 몇 개 회사를 꼽기도 하였다.
‘아카호시’는 황무지를 싸게 산 경우도 거론하면서 안전제일주의자는 가장 좋은 땅을 값을 제대로 주고 사서 소작농을 붙여 농사를 짓고 다음은 싼 토지를 사서 여태껏 고생하기도 하고 그 다음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노력하여 성공한 경우도 열거하였다.
조선땅 매수 러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초기에 이토 히로부미의 정책임을 암시하는 견해도 보인다. 토지문제에 대해서 경찰력을 동원, 농민의 저항을 사전에 방지하라는 총독의 지시가 있고 의병들의 ’역둔토 실지조사‘의 조사원들을 공격한 사례와 일본군과 경찰의 비호와 엄호가 비일비재하였음도 보인다. 토지수탈정책은 결코 근대 토지제도 수립정책이 아니었음을 당시의 일본 유지들의 증언이 증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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