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과 비관의 기로에서
낙관과 비관의 기로에서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4.11.13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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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고문

오늘날의 한반도에는 반세기를 넘는 남북긴장이 있고 남한에는 남남갈등이 있으며 빈부의 양극화현상도 만만치 않은데다 지역간의 불균형도 우려할 수준에 있다. 지방과 농촌의 인구는 줄어 가는데 서울과 도시는 계속 팽창하고 있다. 사람들의 삶의 질은 떨어져 가는데 경기둔화의 분위기는 우리들을 불안하게 한다.
독일은 장벽 붕괴 25주년을 백만 인파가 모여 축하하는데, 우리는 실속도 없는 전단 문제로 남북의 한랭전선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지경이다. 이 난국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하고 묘수를 찾아보지만, 이해관계로, 주도권 집착으로 똘똘 뭉친 세력들이 역사 속에 쌓아 온 장벽들이라 그 견고함이 가히 철옹성이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위신과 행복을 위해서 나서야 한다고 원론적 주장을 펴보지만, 백성들마저 남북갈등 남남갈등 장벽의 기둥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 내일에 대한 낙관이 주저스럽기만 하다. 현실이 회색빛이다 보니 미래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고 과거마저 오늘의 암울함을 예비했던 듯한 역사적 사례들만 불거진다.
‘첫 단추가 잘못 채워졌으니‘ 하고 불평하다가 건국과정의 첫 단추가 잘못 채워진 연원에 생각이 미친다. 주체를 추스르기 어려웠던 식민지 경험은 망국의 역사를 상기하게 되고 망국은 우리들의 실패를 도드라지게 한다. 조선의 주류세력의 자구노력은 정조 개혁의 종언으로 끝나고 비주류세력의 자구노력은 동학혁명의 실패로 끝장남으로서 한반도의 운명은 주인들의 손을 떠나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장에 내맡겨 지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오늘의 남북관계 남남갈등은 우리 내부관계의 역사를 덧붙이게 한다. 거족적인 3.1독립운동 이후 한국의 엘리트들은 민족개량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로 분화되고 신흥의 기독교세력은 민족개량주의의 일각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분화는 독립운동의 전 기간에 관철되어 건국과 그 이후의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년대 중반의 국제정세에 편승한 신간회의 유일당 운동도 있었지만 그 장기적 생명은 존속시키지 못하고 해소되고 말았다.
구호성 ‘우리’ 는 난무했지만 실질과 실천상의 ‘우리’는 없었다.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수자를 면치 못하였고 기득권과 이념에 기반한, 어떻게 해서라도 기필코 승리해야 하는 패거리들이 현상을 장악했다. 지켜야 할 공도와 민주주의가 없었고 있게 되면 패거리의 전략 전술에 귀속되어야 했다. 해방 이후의 제3세력의 소멸과정은 곧 민주주의의 유린과 박멸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낙관과 비관의 갈림길에서 계속 서성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느 한쪽으로 방향을 잡기도 난감할 때, 연변과기대 대외부총장. 평양과기대 건축위원장 이승률의 ‘누가 이 시대를 이끌 것인가’라는 책을 통하여 2001년에 평양과기대가 착공되고 2007년에 준공식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학교운영은 남측의 재단과 북측의 교육성이 향후 50년간 공동으로 수행토록 건립계획서에 규정하였다.
남북갈등의 어둠속에서도 화해와 희망의 벽돌들은 쌓아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삶이 있는 동안, 비록 역사가 휘젓고 간 상처가 아무리 크게 깊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찾아가는 여정은 멈출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된다.
시지프스 신화가 알려주는 인간애와 운명애는 우리 공동체의 길임을 확인한다. 이승률은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속도는 무의미하다’는 간디의 말을 귀뜸한다. 방향이 옳다면 속도를 압축하지 않아도 낙관할 수 있는 마음을 가다듬었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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