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품 진다리 붓, 광주의 자랑.
한국의 명품 진다리 붓, 광주의 자랑.
  • 신문식 시민기자
  • 승인 2014.10.30 22: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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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의 혼줄이 담긴 붓만들기

▲ 안명환 진다리붓 백운동 자택.
뿌리 있는 명품은 다르다. 피와 땀과 애환에 의해서 창조되며 열정과 마음을 다하는 정성과 도전적 창조정신이 담겨 있어야 생명력이 있다. 또 명품은 경제적 여건이 약한 사람들에 의해서 창조되고 개발되기 때문에 많은 창조물들이 명품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중도에 사라지게 된다.

붓은 삼국시대이래로 우리나라 대표적인 필기구다. 붓은 크게 먹물을 머금고 종이와 맞닿게 되는 호(豪) 또는 촉이라고 하는 부분과 손잡이라고 하는 필관으로 나누는데 핵심이 되는 부분이 촉이다.

붓은 황모필이라고 하는 족제비고리로 만든 것을 제일 좋은 것으로 한다. 황모필에 버금가는 붓은 염소털로 만든 고모필이다. 고모필은 궁중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아 양질의 붓으로 평가 받았다.

한국의 명품 '진다리 붓'은 4대를 이어온 광주 백운동의 자랑이다. 오늘은 백운 진다리 붓 무형문화제 안명환 기능보유자를 찾아갔다. 방에 들어서자 크기가 다른 여러종류의 붓과 벽에는 표창장과 감사장. 감사패로 꽉 채워 있었다. 한눈으로 봐도 유명한 기능보유자임을 확인 할 수가 있었다.

안명환 무형문화제(광주광역시 제22호) 기능보유자는 아버지한테 배웠지만 “150여 년 전에 고조부께서 보성에서 태어나서 붓을 만들다가 나주 문평면 옥당리로 이사하여 살면서 붓을 만들었다.”고 한다. “경제가 어려워서 중국으로 들어가셨지만 여의치 않아서 다시 귀국해서 정착하게 된 것이 백운동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고조부 이후 계속 4대가 붓을 백운동에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 큰 붓을 설명하는 안명환 기능 보유자.
어린 시절에는 붓을 만드는 것을 많이 보고 호기심에 “붓을 만드는 일을 해보려고 했으나, 중학시절 밖에 나가 뛰어놀고 싶어서 아버지 가업을 잇는 일에 소홀해지면서 많은 방황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방황이 잘못된 것을 알고 ‘이것이 아니다.’ 싶어 부모님을 도와드렸고 그러다가 가업을 잇게 되었다.” 고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가업을 잇데, 지금과 다른 붓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혁신적인 '큰 붓'을 만들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니가 아버지(안종선) 윗대에는 일반적인 붓, 서당이나 학교에서 글 쓰는 작은 붓을 만들었다가 안명환 기능보유자 이후에 새로운 변화로 큰 진다리 붓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안명환 기능장은 “붓을 만들려면 '흰 염소의 털'을 12월에서 3월에 생산된 털을 사용해야 하는데, 경제적 자금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었다.” 고 말했다. 그리고, “옛날에는 재래시장 5일 장에 가면 중상들이 농촌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모아놓은 흰 염소 털이 많이 있었다. 그 흰 염소 털로 붓을 만든 것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지금은 “흑염소가 보양에 좋다는 풍문에 흰 염소를 키우지 않아서 볼 수가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흰 염소 털을 구입하기 위해서 일수 돈을 빌려야 하는 경제적 고통도 있었다. 어찌됐든 붓을 제작하면 “서당 선생님께 붓을 헌상해서 선생님께서 직접 붓을 굴려보고 붓심을 세워보고 하는 등, 심사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서당 선생님에게 “심사평을 높게 잘 받아야 좋은 붓이 된다.”는 것이다. 심사과정에서 잘 못된 붓은 다시 “서당선생의 조언을 받아서 다시 교정정해야 하는 어려운 과정으로 붓을 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서 명품이 되었는데 “어떤 필방에서는 진다리 붓을 사서 진열해서 진다리 붓만 판매한다고 해 놓고 손님들에게 다른 붓을 판매하는 것을 보았기에 지금은 도매로 팔지 않는다.”고 사업자들의 도덕성을 질타했다. “원래 명품 붓은 붓끝이 뾰족하고 털이 가지런하며 원형을 이루고 한 획을 그으면 붓이 그대로 일어나야 한다.”고도 말했다..

▲ 짐승의 뿔로 만든 손잡이의 붓.
그래도 대량 도매로 팔아야 사업을 유지하는 것 아니냐? 고 물었더니, 안명환 기능장은 “상품은 그 사람의 정신이 배어있어야 하고 판매는 정직과 신뢰에 의해서 교환되어야지, 불신이 싹트게 되면 생명력을 잃게 된다.”고 말했다.

백운동에서만 진다리 붓을 만들었느냐? 물었더니, “서울 인사동 대신당 필방에 스카웃되어 붓을 만들었는데 10여년을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서창에 사는 부인을 만나 결혼했다.”고 말했다.

인사동 대신필방에서 불티처럼 팔리는 자신의 붓이 “자신의 공과보다는 대신필방의 명성만 높아지는 것을 보고 부인이 광주로 가자고 해서 옛 대동고등하고 앞에서 붓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처갓집이 있는 지역이 그 당시 광산구 서창으로 이사를 해서 광산구청과 인연을 맺어 '부업단지 사업지원금'을 받아서 붓을 만들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진교필방과 납품계약을 맺고 진교필방에 납품하게 되었는데 진교필방에서 자신들이 만든 붓이 불티 날 듯 팔려나갔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진교필방에서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1985년에 진교의 '다리 橋'자를 한글 '다리'로 바꿔서 '진다리 붓'이라는 특허 상표를 등록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백운동을 '진다리'라는 말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백운동 지역은 그 당시 마누라 없이 살아도 긴 장화 없이는 못사는 황토 땅으로 질퍽거려서 장화 없이 못사는 지역이라 해서 '진다리'라는 말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진다리'의 유래”라고 말했다.

▲ 상장. 감사장 감사패가 벽에 꽉찼다.
백운동의 진다리 유래는 “진교필방과 납품계약을 맺고 일하다가 진다리 붓의 특허 상표등록을 마치고 백운동에 붓을 만든 제작소를 계속하면서 '진다리'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확실하게 말했다.

부친(안종선)은 무형문화재 제4호 보유자 인정서를 1989년 4월 4일 광주직할시장에게 받았으며, 본인(안명환)은 2005년 3월 3일 광주 제22호로 광주 광역시장에게 받았다고 무형문화재 보유인정서를 보여주었다.

진다리 붓을 연구제작하면서 후회하는 일은 없었습니까? 물었더니, “붓 만드는 연구제작소에서 붓 만드는 일에 집중하다보니 세상물정을 몰라도 너무나 몰랐다. 큰 부자가 될 수도 있었는데---,” 하면서 “그것도 내 운명이러니 하고 소화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럼 가장 행복했던 일은? 하고 물었더니,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그것은 진다리 붓을 사간 분들이 서예대회에서 백운동 진다리 붓이 좋아서 대상을 받았다.”라고 전화를 오거나, 대회에서 “입상했다.”며, “진다리 붓 덕이라고 전화 왔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진다리 붓 연구제작 사업을 부인께서 잘 도와줍니까? 물었더니, “그럼요. 많은 종업들과 함께 일하려면 부인의 내조가 절대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업을 물려줄 아들은 있습니까? 물었더니, “3형제가 있는데 붓과 인연도 있고 소질도 있는 아들이어야 합니다. 큰아들이 맡겠다고 하나 소질이 없으면 안 되겠지요. 막둥이가 소질이 있어서 막둥이한테 물려주려고 생각하고 있다.” 고 말했다.

끝으로 정부나 광주광역시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물었더니,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전 학년과정에서 붓글씨 서예시간을 배정했으면 한다. 붓 문화가 쇠퇴하므로 해서 그에 따른 많은 업소가 문을 닫고 있다. 전통문화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학교에서 붓글씨를 공부하는 시간을 배정해서 붓글씨로 정신집중하고 정신 수양하는 교양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라고 말했다.

▲ 붓을 설명하는 안명환 무형문화재 제22호 기능보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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