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의 매개자는 교회였는데…
독일 통일의 매개자는 교회였는데…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4.10.2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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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고문

신문은 김구 선생의 암살범인 안두희를 정의의 몽둥이로 응징한 박기서씨가 서북청년단 재현 움직임에 충격 받은 기사를 쓰고 있다. 암살범 안두희는 서북청년단원이었던 것이다. 북미 기본합의서 체결 20주년을 맞아 미국의 북핵 협상 주역들이 워싱턴에서 만나, 남북충돌의 우려가 고조되고 있음을 걱정하는 소식도 신문은 전하고 있다.
남북관계의 호전과 진전을 기대하는 행여나 하는 민심을 역시나로 실망시키는 남북정권의 통일놀음은 통일운동의 민간화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통일을 위한 학생운동 세력들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하고 외쳤던 열정들이 남북 긴장고조의 완화제가 될 뿐만 아니라 통일운동 주체를 새로 설정해야 하는 당위를 확인하게 만든다.
통일은 그 대박 여부와 상관없이 남북의 민생을 규정할 조건인데 정권들의 몫으로만 계속 남아 있을 수는 없다. 독일이 통일되는 과정에서 정권들이 선도하는 통일의 찬가와 그 피울음들이 광장의 메아리로 요동쳤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지만, 그들은 분단의 벽을 허물고 통일을 달성했는데, 그곳에는 동서독의 독일 인민이 있었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독일교회가 있었다.
1950년 에센 행사에 이어 1951년에는 베를린에서 ‘우리는 형제입니다’라는 모토 하에 30만에 이르는 집회를 열어 독일국민의 단결성을 들어냈다. 1954년에는 기독교 총연합회 행사가 동독지역에서 처음으로 라이프치히에서 열렸을 때, 동서독 양쪽에서 6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모였다.
모임 행사는 선언하여 “동서독이 통일될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른다. 길고 험한 여정이 될 수도 있다. 어느 한쪽이 지쳐 무너지고 다른 한쪽이 자신만 살려고 할 위험성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용납해서도 안되고 또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서로 힘을 모아 단결해 나갈 것이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임”을 표명하였다.
집회의 영향력이 날로 커지자 동독 정권은 총연합회 행사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동서독 사이의 생활조건의 간극이 벌어지면서 동독을 이탈하는 난민 대열이 계속 늘어나, 공산권 최고의 공업화를 자랑하던 동독의 산업현장에 노동력 결핍이 엄중하게 되어, 체제 전반에 대한 신뢰를 떨어트리기에 이르렀다.
모스크바는 국민들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내독 국경선을 봉쇄하여 자유로운 왕래가 불가능하기에 이르러서 1958년의 베를린 위기를 초래 하였지만 독일교회는 1961년 베를린에서 총연합회 행사를 가져 마리엔 교회의 개막식에는 동서독의 정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였다. 독일 인민과 교회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냉전의 현실은 1961년 베를린장벽을 세우게 되고 동독정부는 서베를린으로 가는 모든 통로를 차단하였다.
이러한 현실에서 빌리 브란트 베를린 시장은 1961년8월16일 쇠네베르크(Schoneberg)  시청 앞에서 베를린의 상황전개에 대해서 서방 3개국의 대응의지와 결단을 공개적으로 표시하여 케네디 미국대통령의 현명한 쿠바사태 해결을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동서독간의 장벽 설치는 이산의 아픔을 더욱 크게 하였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국민과 신자들 간의 연대를 끔찍한 방식으로 갈라놓음으로써 오히려 공동체적 연대감을 더욱 강화하였고 자유 이슈에 관여하고자 하는 열망과 책임감을 고양하여, 1962년 쇠네베르크 시청 앞에서 미국대통령 케네디는 “나도 베를린사람입니다” 고 선언했다.
이는 독일과 베를린에 대한 서방진영의 긍정적이며 상징적인 신호를 보내 베를린 시민을 안도하게 하였다. 또 시당국은 동서 베를린 문제에 대한 적극적 입장을 정립하여 교회가 조성한 동서의 소통을 정치계가 인계받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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