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씨구! 친일 아리랑(10)
얼씨구! 친일 아리랑(10)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4.09.1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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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고문
마해송 마종기는 일반 시정인들에게는 낮설겠지만, 문학에 관심을 갖는 분들은 마해송은 아동문학가, 마종기는 시인이라는 것을 알 것이고 그들이 부자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인이자 의사인 마종기는 2005년에 “아버지 마해송”을 출판하였다. 아들은 아버지 마해송이 살아온 파란만장한 길을 더듬어 찾아서 책을 썼음을 밝히고 있었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자신이 격은 구습의 병폐를 쓸어버리기 위해 어린이 운동에 헌신하고 자신과 조국의 명예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공한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를 살아야 했던 어려운 시기의 처신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임을 말하고 있었다.

아들의 아버지 사랑은 진하디 진하여 다작의 시인이 아님에도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을 여섯 편이나 되는 시로 남기고 있었다. 이러한 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가 친일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시인인 아들에게 있어서 친일파는 ‘1945년 이전의 일제 때 반민족적 행위를 한 무리’인데 그것은 집안의 명예와 자신과 자식의 장래에도 관계되는 일이어서 규명되어야만 될 일이었다.

아들은 ‘일제시대 때에 최남선 이광수와 함께 마해송도 동경 유학생에게 징병 권유의 유세를 했다’는 소문을 백방으로 확인했으나 그 증거를 찾지 못했음을 피력하고 있었다. 소문과는 다르게 자신과 조국의 명예를 위해 살았던 아버지의 온전한 모습이 아들에게 큰 안도감을 주었을 것에 필자도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아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식민지 시대에 식민지 지식인의 처신은 결코 쉬울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냥의 시정인과는 달리 지식인의 공동체에 대한 책임은 전방위적으로 요구된다. 아버지 마해송이 사는 조선은 식민지였고 그만큼 일제 권력이 관철되고 있는 시공간이었다.

일제를 부정하여 저항하지 않으면, 그 시공간의 생존자들은 식민권력과 길항하여 이중의 태도로 표면화된 타협과 은익된 자아로 그 생존을 지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생명을 담보할 밖에 없는 저항의 결단도 어렵지만, 길항의 유희도 쉽지 않았으리라. 조선의 정체성을 붙들고 있기에는 망국이라는 객관적 현실이 나라사랑을 허망하게 만들고 광복의 무겁고 힘겨운 짐을 걸머지기에는 20세기 초엽에 이미 확연해진 조선의 운명이 싸워보지 않은 조선의 신식지성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동학과도 의병과도 함께 하지 못한 양반 전통의 개명 지식인들에게는 민족 정체성을 장악하는 것도 세계사적 근대성을 포착하는 것도, 신기루 앞에 갈증 난 소년처럼 힘들기만 하여, ‘이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하는 절망을 정당화하는 희망가의 풍경이 제격이었다.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는 절망상태는 또 하나의 해방을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안겨 주었을까? 당시 아편하는 지식인 이야기가 많이 들려왔다.

길항의 또하나의 축인 은익된 자아의 강박을 못견뎌 그 포장을 걷어차고 타협자의 당당함으로 친일의 신세계를 찾은 후안무치의 편안함은 부귀공명의 꽃비가 그들을 찬양했던 것이다. 반어의 은유마저 고통이다. 아들 마종기에게 아버지 마해송은 결코 타기할 친일파가 아니고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공한 사람이었다.

마해송은 이미 1932년에 31세의 나이로 잡지 <모던 일본>을 인수하여 일본문화계의 존경을 받고 모국의 문화를 선양하기 위해 예술상까지 제정하고 이미 소파 방정환과 함께 아동운동의 선구자였으나, 그의 잡지 활동이 친일의 혐의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빌미가 되고 있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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