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한국땅에서 민족대명절 추석나기
고려인, 한국땅에서 민족대명절 추석나기
  • 권준환 기자
  • 승인 2014.09.05 15: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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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에도 추석은 왔어요
국민의 따뜻한 관심, 제도적 지원 필요해

우리 민족의 대명절 추석이다. 큰 명절을 맞아 사람들은 각자의 고향을 향해 이동한다. 현재 사는 곳과 고향이 멀리 떨어져 있다면 12시간 넘게 걸리는 경우도 있다.

장시간을 차에서 보내면서 몸은 지칠지라도 마음만은 가볍다. 고향에 도착하면 할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우리를 맞아 주시고, 그동안 못 봤던 회포를 풀듯 쉴 새 없이 대화가 오가고 웃음이 흘러나온다.
어머니는 전을 부치고, 작은 아버지는 밤을 깐다.

명절날 찾을 수 있는 부모님이 있음에 감사하고, 일가 식구들끼리 모여 앉아 밥을 먹고, 과일을 먹으며 담소를 나눌 수 있음에 행복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광주에는 고향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원래 고향은 우리 땅이지만 150년 동안 떨어져 다른 나라에 살아온 터라 그들에겐 지금의 고향은 참으로 먼 곳이다.
광산구 월곡동에 있는 고려인마을을 찾았다.

골목에 차를 대고 고려인마을센터에 가기 위해 앞에서 오고 있던 주민에게 “길 좀 묻겠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 주민은 손사래를 치며 외국어로 무어라 말을 했다.

아마도 ‘한국말 할 줄 몰라요’라는 뜻인 것 같았다. 외모는 전형적인 한국인인데 한국어를 못하다니. 고려인마을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영락없는 한국 아이들이지만

일제강점기 때 만주로 간 사람들은 조선족이라 부르고 연해주로 간 사람들은 고려인이라 불렀다. 고려인동포는 1860년 무렵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시기에 농업이민, 항일독립운동, 강제동원 등으로 러시아(구소련)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고려인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몰도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즈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등 독립국가연합 내에 거주하는 교포들을 칭하는 총체적 용어다. 러시아어로는 ‘까레이스키’라고 한다.

고려인마을센터에 도착해 잠시 기다리고 있자 고려인마을의 목회자면서 새날학교 교장인 이천영 목사가 도착했다. 이천영 목사는 고려인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처사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목사가 센터 바로 옆에 위치한 고려인마을 어린이집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어린이집에서 일하고 있는 고려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라고 한 후 급한 일이 많은지 어딘가로 바쁘게 이동한다.
어린이집에서는 꼬마 아이들이 블록을 맞추고, 소형 미끄럼틀을 타면서 뛰어 놀고 있었다. 영락없는 한국아이들이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한국어 교육을 받지 않아 러시아 말을 쓰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자라면 새날학교에 들어가 한국어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을 것이다. 아이들은 기자의 카메라가 신기한지 주위에 몰려들어 구경했다. 살며시 카메라를 건네주자 신이 나서 서로 자기가 찍어보겠다고 난리가 났다.
보다 못한 신마리나 씨가 아이들을 불러 모아 TV로 만화를 틀어줬다. 시끌벅적하던 어린이집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한국에 살지만 한국말 서툴러

그제야 정올가(67·여)씨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올가씨가 한국말이 많이 서툴러 인터뷰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나마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마리나씨가 일을 어느 정도 끝내고 옆으로 와서야 대화를 진행할 수 있었다.

올가 씨는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5살에 어머니와 함께 우즈베키스탄으로 갔지만, 6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아버지가 있는 카자흐스탄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녀 나이 7살이 되던 해 또 아버지가 어머니를 따라 그녀의 곁을 떠났다.

결국 어머니의 남동생인 외삼촌이 그녀를 우즈베키스탄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와 다시 카자흐스탄에 있는 College(의무 교육을 마친 후 대학 입시 준비나 전문적인 훈련을 받기 위해 가는 2년제 교육기관)에 진학했다.

이 말을 하며 올가씨는 웃음을 터트렸다. 두 나라를 계속해서 왔다갔다 했다는 것이 쑥스러웠던 것인지,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니 파란만장한 추억이 돼서 그랬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College를 졸업하고 1년 동안 공부해서 회계사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이 너무 많고 적성에 맞지 않아 관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마트나 백화점의 가격을 조사한 후 도매상에 가서 물건을 구입해 납품하는 일이었다. 일하면서 만난 남편과 1965년에 결혼해 3남매를 낳았다.

현재 큰아들은 러시아에 있고, 올가씨는 작은 아들, 막내딸과 같이 한국에서 살고 있다. 현재 그녀의 막내딸도 어린이집 교사로 있지만, 당시 자리를 비운 상태여서 만나볼 순 없었다. 올가씨는 2009년에 한국에 들어왔다. 당시 딸이 한국에서 임신을 하게 되면서 도와주러 온 것이었다.

▲태루이자 씨
추석은 고려인에게도 기분 좋은 날

올가씨는 한국이 너무 좋다고 했다. 공기가 좋아서 살도 찌고 건강도 좋아졌다고 한다.
그녀는 “우즈베키스탄은 공기가 안좋아서 머리가 아파요. (한국은)사람들도 좋고, 할머니나 아저씨들이 친절히 대해줘요”라고 말했다.

그녀의 남편인 김슬라바씨도 가족이 있는 한국으로 오고 싶어 하지만 현재 일을 하고 있어 올 수 없는 상황이다.

그녀에게도 추석은 기분 좋은 날이다. 올가씨는 “추석은 한국의 big day잖아요. 고려인이라고 다르지 않아요. 기분 좋고 행복한 느낌이에요. 가족들이 모이니까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오후 5시30분이 지나자 일을 마치고 고려인 부모들이 하나 둘 아이를 데리러 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엄마가 올 시간이 되면 힐끔힐끔 문 쪽을 바라봤다. 그러던 중에 고려인 여성 한 명이 어린이집으로 놀러왔다.

올가씨의 표현을 빌리면 ‘젊은 할머니’인 태루이자(50)씨였다. 루이자씨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다. 러시아에서 살다가 러시아인이었던 남편이 죽고 한국에 혼자 온지는 1년이 됐다. 딸이 한 명 있는데 미국 하와이에서 살고 있다.

그녀는 한국말이 꽤 유창했다. 본인은 한국말을 잘 못한다고 했지만 의사소통이 별 무리 없이 되는 것을 보면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의 할머니는 부산사람이었고, 어렸을 적 할머니 손에 많이 커서 그래도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것 같다고 그녀는 말했다.
루이자 씨는 신조야 고려인마을센터장의 친구이기도 하다. 우즈베키스탄에 일자리가 없어 선조의 땅이면서 친구가 있는 한국으로 혼자 넘어왔다.

이렇게 함께 모이니까 괜찮아요

가족이 있는 올가 씨와는 달리 루이자 씨는 혼자기 때문에 추석 때 많이 외롭지 않냐고 물었다. 그녀는 “목사님, 조야(센터장), 고려인들이 함께 모이니까, 혼자라는 외로움이 많이 괜찮아진다”며 “한국 아줌마들과도 자주 통화하고 잘 지낸다”고 답했다.

신조야 고려인마을센터장은 “이곳으로 오는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여기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싶어 온 것이다”며 “한국 국적을 받는 것이 힘들다면 영주권이라도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추석에 비록 찾아갈 고향이 없어도 고려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명절을 지내고 있다. 고려인도 우리의 민족, 그리고 동포라는 생각으로 국민들의 따뜻한 관심이 필요하다. 그들이 우리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지원대책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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