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동포 이야기⑦ 독립운동가 박밀양(박윤해) 후손 - 김리마(81세)
고려인 동포 이야기⑦ 독립운동가 박밀양(박윤해) 후손 - 김리마(81세)
  • 박재완 객원기자
  • 승인 2014.08.28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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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고려인들이 신원(伸寃)되야 한다. 우리 정부의 몫이 크다, 이스라엘은 이미 그들의 고국으로 모두 되돌아갔고, 패전국인 일본 역시 자국민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만 유독 이 문제에 미온적이다.
하바롭스크 인근의 비로비쟌은 유태인 자치구이다. 오래전 그들은 비로비쟌을 자치구로 지정해 많은 자국민의 신변에 각별한 대우를 해주고 있었다. 지금은 우리 고려인들이 유태인 자치구에서 그들을 대신하여 이방인처럼 살아가고 있다
러시아 극동 지방의 고려인들은 구소련의 국경 소수민족 중 큰 무리에 해당된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조선은 일제감점기었던 시절이다. 이들은 함경도를 비롯하여 조선 전체의 흉년과 가난한 농민들이 삶의 터전을 찾아 국경을 넘어 이주하면서 서서히 형성되었다.
고려인의 이주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초에 두드러졌다. 1917년 ~ 1926년에는 고려인들이 거의 17만명으로 3배로 늘어났고, 블라디보스토크 농촌 인구의 1/4을 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구소련의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으로 러시아 동부의 고려인 단체에 대한 고려인 자치령이 모스크바에서 논의되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토지에 대한 경쟁을 우려한 지역 러시아인의 반대와 일본에 대한 정치적인 고려로 1925년에 최종적으로 거부되어, 결과적으로 그 반대의 정책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그보다 작은 고려인 자치구는 허가되었고, 한국어 학교와 신문이 설립되었다. 또한, 이러한 정책 노선은 국경 너머의 일본의 속박과 대조되는 구소련의 소수민족에 대한 모범적인 정책으로서 제시되었다.
한편, 중앙 정부는 1926년 12월 6일 채택된 비공개 계획을 승인하였다. 이는 구소련을 따르지 않는다는 의심이 있는 하바롭스크 북부에 거주하는 88,000의 고려인의 절반을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주 정책은 정치적, 재정적인 여러 가지 이유로 1930년 이전까지는 시행되지 않았으나, 1930년을 시작으로 충성심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고려인들은 북쪽 지방으로 강제로 이주되었다.
바로 그곳이 캄차카반도의 마가단이다. 하바롭스크에서 그 당시 차량으로 이동하면 보름 정도 걸리며, 지금도 일주일 정도 차량 이동이 가능한 곳이다. 많은 고려인들이 귀양을 갔던 곳이다. 지금은 후손들이 부지런한 근성으로 마가단에 많은 지역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초기에는 작은 숫자였으나 이것이 소련의 첫 번째 민족청소로 여겨 고려인을 이곳으로 보내기도 했으며, 1935년부터 3년 동안 2,500명의 고려인을 ‘일본 간첩’이란 혐의로 총살하기도 했다.
김리마 할머니의 아버지 박기협씨와 박밀양씨는 8촌 형제간으로 삼촌인 박밀양 선생은 김리마를 곧잘 안아 주기도 했다, 박밀양 선생은 소련 공산당에서 여러 가지 일을 돌보며, 고려인들의 위해 많은 일을 하였으나, 지식인으로 알려져 1937년 11월 6일 심야에 스탈린이 정권에 의해 일본간첩 협의로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다가 일 년 후 총살당했다. 아버지는 그 다음날 끌려가 감옥에서 옥사했으며, 어머니 김해숙씨는 1958년 통한의 한을 안고 숨을 거두었다.
후손인 김리마(81세) 할머니는 이르츠크 근처인 치따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한다. 그녀의 집은 부유했으나, 일본 첩자 죄목으로 모든 재산을 몰수하여 길거리에 패댕이처져 풀을 먹기도 하며, 감자를 깎고 버린 껍질을 씻어 먹기도 하며, 돼지에게 주는 밀기울을 먹고 자랐다. 다행히 친척들의 도움으로 사범대학을 마치고 대학교수가 되었다.
철학과 교수로 은퇴했는데 교수 시절 때는 삼촌과 아버지의 신원에 몰두해 모두 무죄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은퇴 후 88년부터 연금으로 근근하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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