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씨구! 친일 아리랑(2)
얼씨구! 친일 아리랑(2)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4.07.17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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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고문/전남대 명예교수

대체적으로 말하여 인간 본성은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것으로, 같거나 유사한 욕구와 충동을 공유한다. 같은 세계에 살고 있고 같은 실재와 대면하고 살면서도, 다른 몸짓들을 보이면서 다양한 삶의 문양을 드러내고 있다.
같은 시간과 공간의 환경에 살았고 살면서도 보편적 진리로 귀일되지는 않는다. 임금의 간곡한 부탁을 받았으면서도 성삼문은 사육신이 되었지만 신숙주는 왕권을 찬탈한 수양대군을 도와 조선의 명신이 되었다.

조선이 망하는 마당에 의병이 되어 진충보국을 다하여 순절한 이들도 많았지만 매국에 앞장서서 온갖 복락을 누렸던 친일도배들 또한 같은 조선의 환경에서 자란 이 땅의 자손들이었다. 인간의 사적 행위는 행위자의 책임에 국한되지만 그의 공적 행위는 타인의 삶에도 영향을 끼치므로 그 책임은 타인들이 간여할 수 있는 것이 된다.
하물며 민족 구성원 모두의 생살여탈권을 침략자에게 양도하는 공적 행위를 자행한 것은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답이 자명한데도 책임을 묻는 권력이 없거나 있더라도 책임추궁을 호도하는 권력이 상황을 장악해 버리면 책임추궁은 물 건너간다.

미군정과 건국 초기의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를 무력화시켜 친일파 청산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오히려 반공 건국의 남한의 분단정권을 세운 이승만의 통치하에서는 친일파들이 권력의 전면에 대거 포진하게 되었다. 반민특위는 친일파청산의 기치만 내걸었지 ‘미완의 결과’만을 남긴 채 1949년 8월 31일 업무를 종료하고 말았다.
2003년 참여정부 출범이후 과거사 청산작업의 일환으로 친일청산 작업이 진행된 결과 2005년 발족한 친일 규명위가 1,006명의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결정하고 2009년에는 친일 인명사전이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많은 시간이 경과한 이후에 역사적인 친일 청산이 이루어져 종래의 미완의 결과를 면할 수 있었다. 근래에 뉴라이트들에 의해서 친일파 근대화 친일파 민족주의가 제기됨으로써 친일파 청산에 혼선이 야기되고 있다.

과거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은 1920년 2월 5일에 일곱 종류의 죽여야 할 대상을 열거하였는데 그 마지막에 모반자 변절자가 있다. 이들은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가 변절했거나 훗날 지조를 버리고 직간접으로 일제에 협력한 사람들을 말한다.
윤치호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은 계몽기와 독립운동 초기에 활동한 혁혁한 문화인들로 그 공과를 저울질할만한 정황을 보이는데, 최남선을 그 대표적 인물로 그 삶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친일 족적을 훨씬 능가하는 그의 최초의 행적은 1907년 약관 18세에 신문관을 세워 계몽도서를 출판하고 이듬해에는 잡지 ⌜소년⌟을 창간하고 그 창간호에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게재해 한국 근대문화사의 모두를 장식하였다.

3∙1운동 시기에는 유명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그 결과 31개월간의 감옥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 육당이 친일파의 지탄을 받게 된 것은 1928년에 총독부의 역사 왜곡기관인 조선사편수회의 편수위원직을 수락한 사실이었다.
그들이 편찬하고자 하는 조선사는 식민사관에 의한 조선사를 연구 왜곡하는 것이었지만, 조선사의 체계적 연구의 첫걸음이었고, 최남선은 조선인 역사학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조선사편수회가 우리의 전통 도서를 수집 폐기하는 것을 자의적으로 행하고, 연구 골격을 정할 때, 편수위원은 작은 견제일망정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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