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의 친일 언론
윤치호의 친일 언론
  • 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 승인 2014.07.0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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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민족폄하와 친일언론이 빌미가 되어 재상의 꿈을 접어야 했던 문창극은 이미 역사적 인물이 된 대표적 친일파 윤치호를 두둔하는 언설을 늘어놓았다. ‘끝까지 하나님과 함께하고 영어도 잘한 사람’으로 새삼스럽게 그를 소개하고 나섰다. 윤치호는 1887년 기독교 세례를 받고 미국 남부의 벤더빌트대학에서 3년간 신학을 전공하였다. 그의 영어 실력은 발군하여 젊은 날 미국 푸트공사의 통역을 맡기도 하고 영어로 일기를 쓰기도 하였다.

문창극이 영어를 잘 한다고 그를 자랑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그런 수준이었다. 많은 친일 전향자들과 마찬가지로 윤치호도 처음부터 친일분자는 아니었다. 젊은 날에는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신사유람단에 가입하고 김홍집내각의 외무차관과 박영효내각의 문교차관을 지내기도 하고 1897년에는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서재필 이상재등과 함께 독립협회운동을 이끌기도 하였다.

곳곳의 지방수령을 거처 1904년에는 외무차관이 되었다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사퇴하였고 1906년에는 대한자강회 회장으로 국민운동에 헌신했고 1907년에는 신민회 회원으로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 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10년에는 YMCA이사와 부회장을 맡았다. 1912년에는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복역하기도 하였다. 분명 개화기에 있어서 그는 선각자이고 지도자였다.

그런데 1920년부터 친일단체와 모임에 간여하여 1930년대 말부터는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941년에는 황국신민으로서 일제에 충성과 협력을 다하겠다는 결의문을 낭독하고 조선 임전보국단의 고문으로 일제의 징병에 협력할 것을 공개적으로 권유하고 있었다. 1945년에는 처음으로 일본제국의회의 직선 귀족의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친일파로서 그의 영광이 극에 달한 것을 볼 수 있겠다.

그의 화려한 경력과 영광도 종전과 함께 끝장나고 해방후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고 국민들의 지탄을 받은 가운데 자살로써 그의 생을 마감했다. 17세의 나이에 조선 최초의 동경 유학생이 된 그는 일본을 통한 근대화론자가 되었다. 봉건시대의 관료답게 반민중적 성향을 시종 들어내고 있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배외 반개혁정책을 주장하는 보수파가 조선의 실권을 장악할까 두려워 일본정부에 그 진압을 요구하기도 하고 민란을 대외적 위기에 못지않게 국가의 기초를 뒤흔드는 위기로 받아들였다.

개혁의 가능성을 우민인 인민에게서 찾지 못한데다 왕의 권위와 왕의 노여움에 대한 공포가 있음으로 해서 개혁주체로서 자신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윤치호는 근대주의자이면서 엘리트주의자였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윤리적인 자기완성에의 높은 집착으로 치열한 자기반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자기공동체에서 열등성만을 발견한 그에게는 그와 종교를 같이하는 서구인은 ‘문명의 교사로서 인류의 문명화라는 성스러운 임무를 양심적인 충성심으로 수행하는 자들이었고’ 일본은 강력한 무력에 의해 지지되는 군주중심의 계몽된 나라로 우민일 뿐인 민중을 적대적으로 관리해서 자본주의적 발전을 신속하게 이룬 바로 그런 국가였다.

윤치호는 조선이 문명국의 지배를 받는 것은 비문명의 상태인 채로 독립을 유지하는 것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자기정체성이 해소된 뒤에 새로운 의부처를 식민조국 일본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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