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의 역사에 줄을 끊어야 한다.
반복의 역사에 줄을 끊어야 한다.
  • 신문식 시민기자
  • 승인 2014.04.29 0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주의 선비 김천일 의병장의 애국애족정신을 계승하자.
▲ 필자.

세월호 침몰사고로 인해서 온 나라가 상중이다. 모두가 근신하면서 오늘의 현실을 냉정히 돌아보자. 세월호와 같은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무수히 많이 있었다.

임란 때 도성의 백성을 버리고 도피한 선조대왕은 어쩔수 없다고 하고. 6.25 때 서울시민에게 거짓방송을 한 후 한강교 폭파를 한 사건이 있었다. 기억에 남는 최근 사건으로 성수대교 붕괴사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서해 태인 앞바다 기름유출사고, 외국어대학생들의 오리엔테이션 리조트 폭설 붕괴 사고 등등이 있었다.

대형 참사가 육해공에서 많이 발생했던 사례를 보면 학습장에서 배우고 유비무환의 대비책을 마련했어야 함에도 반복하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국민이요, 불신의 정치꾼들이며, 무능의 정부 대한민국이 아닐 수가 없다.

대형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정부에서는 앞으로 철저하게 대비해서 두 번 다시 발생하지 않겠다고 누차 말을 했었다. 지금까지의 참사는 안전불감증의 총체적 병폐에서 발생한 것이요, 무사안일주의요, 복지부동이라는 것이다. 구하기 어렵고 귀한 학습들을 한두 번도 아니고 수차에 걸쳐서 했건만 수행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번의 실패나 실수를 반면교사로 삼아야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요, 국가경영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외국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는가?. 세계경제대국 열 번째의 나라라 자칭하지만 우리의 사고 처리 하는 것을 보면 아직은 멀었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필요하다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한편으로 우리나라를 비웃으면서 국가 존재를 무시하는 냄새가 있는 것 같아 매우 불쾌 했었다. 나라가 국민의 불신을 얻을 때 어떻게 되겠는가?.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과거의 대형사고나 세월호사고 처리과정을 보면서 피를 토하며 죽을 심정이다.

제일 먼저 국회의원들이 문제이다.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정부의 비난과 추궁과 책임 떠넘기는 말장난만 할 것이 아니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냉정하게 원인을 분석해서 대책 마련을 위한 입법활동을 했어야 함에도 제1사고 제2의 사고가 연속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은 국회활동이 너무나 미진한 결과이며, 한해를 넘기면서 몇 백건의 폐기법안이 발생한다는 것부터 직무유기이다,

국회의원직을 내놓거나 급여를 반납해야 하는 것이 국민의 대변자로서, 대표자로써 부끄럽지 않는 정의로운 태도인 것이다. 대형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국민의 대표자로써 정부를 탓을 하는 것 자체가 매우 부끄러운 의롭지 못한 일. 일을 하지 않고 밥을 먹을 수야 없지 않는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도성이 함락되자 선조는 평양으로 신의주로 도피하려 하자 서울 백성들은 백성을 죽게 놔두고 도피한다고 돌을 던지며 왕실을 불신했다. 도피하는 임금의 마음은 어찌했겠는가?. 임금의 도피는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없이 도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임란 당시의 조선왕조도 조정이 연일 당파싸움으로 상호 불신관계가 팽배하였기 때문에 외침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역사는 말한다. 국란 중에도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뜻있는 인물들은 언제나 있었기에 국가는 존재하고 사회는 돌아가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제일 먼서 의병의 기치를 내걸고 뜻있는 선비들에게 의병 일으키기를 호소한 나주의 선비 김천일 의병장이 있었다.

김천일 의병장은 1592년 임진왜란 때에 나주에서 고경명(高敬命), 최경회(崔慶會), 박광옥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호소하고, 5월 6일 의병을 일으켰으며, 평안도를 향하다 왜적과 전투를 벌이며 수원 행산 고성을 거쳐, 8월 전라병사 최원의 관군과 함께 강화성으로 들어갔다.

그 공으로 장례원 판결사가 되고 창의사의 군호를 받았다. 왜군의 점령 하에 있던 한성부에 결사대를 비밀 잠입시켜 싸우거나, 한강변의 여러 왜군 진을 급습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군대가 개성으로 오고 있을 때, 이들에게 지형과 적의 형편 등을 알려 작전을 도왔다.

왜군이 남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자, 이를 추격하여 1593년 음력 6월에 절도사 최경회 등과 진주성에 주둔하였다. 1593년 명나라와 왜국 간에 강화가 제기되었을 때 이를 반대했다. 그 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이 대군을 이끌고 성벽을 넘어 들이닥쳤으나, 아군은 화살이 떨어지고 창검이 부러져 대나무 창으로 맞서 싸우다가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그의 아들 김상건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김천일 의병장과 같은 선비들과 백성들이 붓을 농기구를 내려놓고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던 난중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나라는 구해지고 호남의 정신은 길이길이 빛나는 것이다. 불신에 앞서 애국하는 이 정신을 이어받자. “若無湖南 是有國家” 이순신장군의 말씀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