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를 만든 문인(文人) 소전 손재형
서예를 만든 문인(文人) 소전 손재형
  • 오병희(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 승인 2013.12.12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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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 손재형 승설암도(勝雪庵圖), 1945, 23x35cm
서예는 동양예술로 정신을 통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서예의 점은 정적인 것이 아닌 동적인 것이고 선은 생명력과 의미가 있는 획으로 정신을 담고 있다.

주역에서 말하는 획은 역(易)에서 근원 하는 것으로 서(書)의 점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태로 음과 양의 개념을 담고 있다. 동국진체는 조선 후기에 일기 시작한 조선적 서법을 말하며 중국 법첩의 범주를 벗어나고자 하는 중요한 자각적 예술 운동이었다.

동국진체는 실학의 영향으로 개성을 강조한 글자로 참됨(眞)을 강조하고 인간의 자유로움을 표현하여 거짓된 나(假我)에서 벗어나 참된 나(眞我)를 찾는 것이다. 18세기 당시 청에 대한 문화의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의 심성을 드러내는 글자로 심층 깊은 곳에서 나온 우리만의 독특한 서예 양식이다.

진도출신 소전 손재형(1903-1981)은 동국진체를 바탕으로 예서체의 새로운 서체를 완성하여 소전체를 만든 남도의 대표 서예가이다.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에 뿌리를 둔 손재형의 동국진체는 필흥을 느끼게 하는 자유로운 리듬감을 가진 서체이다. 손재형은 한글과 한자 서예를 접목하고 문기 넘치는 글을 썼으며 한글의 전예체화는 한글서예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손재형의 동국진체는 평보 서희환, 장전 하남호, 금봉 박행보, 원당 김제운 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서희환은 평보체라는 한글서체를 창의적으로 개발하였으며 하남호는 스승의 서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경지를 일궜다.
▲손재형, 금강산, 화선지에 먹, 33x63
서예가로서 손재형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일본의 서도에서 벗어나 서예라는 용어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서예는 중국에서 서법(書法), 일본에서 서도(書道)라 부르는데 우리는 일제강점기까지 서예를 일본의 영향으로 서도라고 불렀다.

해방 후 1945년 9월에 손재형의 구상에 의해 조선서화동연회(朝鮮書畵同硏會)가 결성되었고 손재형은 서도(書道)라는 말 대신 새로이 서예(書藝)라는 말을 쓰자고 제안했다. 바로 우리가 서예라고 부르는 명칭은 소전 손재형이 만든 용어로 이러한 내용은 임창순, 이구열, 이흥우 등이 함께 쓴 한국 현대서예사(통천문화사, 1981년)에 수록되어 있다.

문화재 지킴이로서 손재형은 1944년 일본으로가 동양철학자 후지즈카 지카시를 한 달여간 설득한 끝에 김정희의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찾아 고국으로 돌아온다. 문인화가로서 손재형은 산수화, 괴석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승설암도(勝雪庵圖)>(1945)는 정원과 담과 집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격조 높은 문인화이다.

전체적으로 문기가 느껴지는 빈 집안의 허(虛)는 물상 세계의 비움이 아니라 내 마음의 비움으로 빈 공간은 무아지경에 이른 경지를 보여준다. 화면 중앙의 갈필의 못생긴 두 그루의 나무와 괴석은 청(淸)대 유희재(劉熙載)가 말한 추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소재로 질박한 군자의 내면을 상징하는 것이며 의기(意氣)를 표현한 것이다.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단발령 금강산>(1962)은 단발령에 올라 금강산을 대면한 순간의 그림이다. 금강산이란 대자연을 보면서 대자연의 본성과 마주하는 것으로 무엇이 나이고 무엇이 대자연인지를 묻는 문인화이다.

화면상단에 금강산 암산을 하단에는 습윤하고 부드러운 토산을 배치한 것은 겸재 정선의 <금강산도>의 영향을 알 수 있으나 겸재의 <금강산>에 비해 부드러운 문기가 느껴진다. <단발령 금강산>은 수묵의 농담으로 그린 천인일치의 초자연적인 표현을 한 문인화로 화폭 밖 너른 공간은 실을 넘어서 허의 세계로 이 공간은 무욕과 깨달음의 공간으로 천(하늘)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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