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 사라져버린 학산 ‘윤윤기’ 선생
역사 속에 사라져버린 학산 ‘윤윤기’ 선생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10.17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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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무상교육·무상의료 실천한 항일독립운동가
광주교대 오는 22일 윤윤기 기념 흉상 제막식 예정

▲학산 윤윤기 선생
학산 윤윤기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학산 윤윤기 선생(1900~1950)은 칠흑 같던 일제강점기 시절 신사참배, 창씨개명, 식민지 교육 등에 저항하며, 조선민족 최초로 무상교육 기관인 양정원 설립, 무상의료를 실천한 선각자이었지만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업적을 지닌 그가 조명 받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학산은 광복이후 좌익, 우익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남북이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앞장섰던 분이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우익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결국 길거리에 버려진 채 숨을 거뒀기 때문에 교과서에서 조차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현재 광주교육대학교는 이러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던 학산 윤윤기 선생의 독립운동 활동, 민족교육 활동, 무상교육과 무상치료에 대한 활동을 연구하고 재조명하고 있다.

최근 광주교대에서는 이러한 연구의 결과물중 하나로 오는 22일(화) 교내 교육박물관 앞에 학산 윤윤기 선생의 기념 흉상을 세우고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이에 대해 광주교대 사회교육과 김덕진 교수는 “학교에 흉상이 들어서게 된 이유는 학산 선생은 광주교대 1회 졸업생으로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창씨개명 등에 저항하며, 우리교육을 펼쳤던 민족교육자이기 때문이다”며 “교육자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학산 선생의 사례는 귀감이 되는 차원이며, 학교 90주년 기념사업 중 일환으로 세우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푸릇푸릇한 녹차 밭이 펼쳐져 있는 전남 보성에서 1900년에 태어났다. 유교사상과 개화기가 혼재되어 있던 시절, 학산은 과감히 댕기머리를 자르고 신학문을 배우게 된다. 이후 전남공립사범학교에 입학하여 교사의 길을 걷게 됐다.

학산 윤윤기 선생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인 여유를 챙기기보다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읽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이들을 위해 한글과 국사교육을 시키면서 보성에 위치한 천포간이학교(회천동초등학교)에서 지내왔다.

결국 일제의 가혹했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천포간이학교 교사를 그만 두고, 자신의 뜻과 함께하는 이들과 머리를 맞대고 학생 전원에게 무상교육을 실시했던 ‘양정원’을 운영했다.

▲윤윤기 선생 기념흉상 중간 제작과정 ⓒ김정태 작가 제공
2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양정원은 모두에게 열린 개방학교였으며, 조금의 월사금을 받지 않고 야학, 취업교육 등을 펼쳤던 곳이었다.

그는 조선어교육, 조선역사교육, 야학운영, 농촌 계몽운동 등을 전개하며 이 지역주민들에게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자긍심을 심어 주었다.

이 외에도 기생충 예방 및 구충사업으로 마을사람들에게 무상의료를 실시하고, 먹고살기 어려워 아파했던 우리 민족들을 위해 농촌계몽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처럼 그동안 자료 등의 한계료 학산 윤윤기 선생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가운데 광주교대의 윤윤기 기념흉상 제작, 사료 발굴 등을 통해 학산의 정신을 받들어 계승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기를 기대해본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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