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38> 80년 5월 녹두서점 지킨 여성운동가 정현애(2)
<광주전남여성운동사38> 80년 5월 녹두서점 지킨 여성운동가 정현애(2)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8.29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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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항쟁부터 전교조 여성 운동하기까지

선선한 가을바람이 부는 9월이 다가왔다. 몇 개월간 국정원 선거개입 진상규명 시국선언 촛불대회가 전국에서 열리고 있는 가운데 여성운동가 정현애씨는 80년대의 시대상황을 떠올려본다.

평소 책 읽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결혼 이후에도 전남대 학생운동 출신으로 녹두서점을 운영했던 남편 김상윤씨의 모임, 사회운동을 하던 친구 모임과 함께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활동을 해왔다.

정현애씨는 차를 마시며, <시민의소리>기자와 일주일 전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비상계엄령이 발표되기 전 1978년 윤상원씨를 만났다. 당시 시대상황은 유신헌법으로 군사독재정권의 부당함을 느끼는 수많은 대중들이 민주주의를 찾기 위해 뜨거운 함성소리가 높아졌다.

24시간 개방되었던 녹두서점

녹두서점은 남편 김상윤씨와 윤상원씨 이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모인 민주화운동 인사들의 담론장이였다. 한쪽 방은 24시간 개방되어 민주인사들이 찾는 토론장으로 이용하고, 나머지 한 칸짜리 쪽방은 정현애, 김상윤씨가 신혼살림을 차린 신혼 방이었다.

정 의원은 “녹두서점에는 민중경제론 등 검열로 인해 판매 금지된 책들을 볼 수 있었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공급하기도 했다”며 “자연스럽게 녹두서점은 타지방 사람들도 찾는 민주화 운동 연결통로였고, 서점에 있는 전화기는 급속히 경색되어가고 있는 정국을 확인하면서 민주인사들을 피신할 수 있게 만든 상황 연락실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장성 삼계중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그녀에게 녹두서점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막는 복병(?)이었다.그들이 운영하던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사회운동 교류를 이어갔기 때문에 민주 운동의 열정을 갖고 모인 사람들을 위해 끼니를 거르지 않도록 매번 식사 대접을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힘든 운동권 사람들을 위해 차비라도 얹어서 보내는 등 뒷받침을 해줘야 했고, 서점의 수익금은 민주인사를 위해 쓰였기 때문에 결국 금전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면치 못하기도 했다.

정 의원은 당시를 떠올리며 “때로는 학생운동을 하고, 의식화 교육을 받던 학생을 자식으로 둔 부모님들이 녹두서점을 찾아와 화풀이를 하곤 했다”며 “그럴 때마다 속상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녹두서점이 민주주의 운동의 발원지라고 할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그렇게 정현애 의원은 80년 진보적 여성단체였던 송백회 활동을 하며 사회문제, 여성문제, 농민문제, 여성노동자 인권문제를 그들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여성운동을 해왔다.

5월항쟁 진상규명 위해 소식지 유포

당시 송백회는 자발적인 민간단체로 자체 수익사업을 통해 자립적 토대를 형성했었다. 송백회 회원들은 주로 민청련 구속자 부인, 여성 노동자, 여교사, 간호사, 주부 등 진보적 여성들로 모인 단체였다.

비상계엄령이 떨어지고 타깃은 ‘광주’가 되어 80년 5월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5월 17일 서점을 정리하고 닫으려는 순간 사복형사들은 다짜고짜 남편 김상윤씨를 끌고 갔다. 민주 재야인사들의 모임 장소로 활용했던 녹두서점이 당연히 검열대상 1위였던 것이다.

그러나 남편이 연행되어 놀란 가슴을 다스리고 그녀는 서둘러 민주 인사, 학생들을 피신하도록 연락을 돌렸다.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숨을 고르며 정 의원은 “비록 남편이 잡혀갔지만 민주인사들이 남편처럼 연행되어 잡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순 없어 알고 있는 전화번호를 총동원하여 각계각층에 떨리는 손가락으로 다이얼을 돌렸다”고 떠올렸다.

그리고 5월 18일 이후, 연행된 사람의 부인들은 녹두서점으로 하나둘씩 모이고, 들불야학의 윤상원씨와 참혹한 상황을 알려 부당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유인물을 만들고 소식지를 제작했다.

그녀는 80년 5월 연락업무를 맡아 원로급 민주인사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고, 모인 사람들과 함께 화염병 제작을 하기도 했다. 계엄군에게 희생당한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서점에서 조기와 검은 리본 제작해 추도식을 통해 정정당당하게 당국에 알리려고 했다.

또한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는 것을 느끼고, 늘 주시를 받던 녹두서점과 YWCA를 오가며 독재정권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더욱 열성적으로 모금활동, 취사활동, 궐기대회준비, 가두방송 등을 활발히 추진했다.

교육 부당함 알리기 위해 전교조 활동

그렇게 녹두서점을 지켜온 그녀는 “이미 목숨은 내놓고 끌려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맞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며 “녹두서점에서 만들던 소식지는 YWCA로 옮겨 투사회보와 대자보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들불야학팀과 여성들이 만든 투사회보는 널리 퍼져 광주 시민들을 길거리로 나오도록 만들었고, 여성으로써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총동원해서 시민군들과 함께 계엄군에 맞서 싸웠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재진압이 시작될 것을 예측하고 서둘러 녹두서점에서 그동안 상황일지를 정리하려는 도중 정 의원과 시동생 김상집씨는 총으로 무장한 계엄군에 의해 군부대로 연행됐다.

그녀는 “이로 인해 우리 집안은 나를 비롯해 남편 김상윤씨, 시동생 김상집씨, 시누이 김현주씨, 친정동생 정현순씨 모두가 연행되었었다”며 “어처구니없는 유언비어가 떠돌기도 했고, 연관 지으려야 지을 수 없는 음모를 조작해서 수사를 받아야 했다”고 말했다.

정현애씨는 같은 해 9월에 석방이 되고, 오월가족회와 함께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해 애쓰며 여성문제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여성을 주체적 인간으로 각성시켰다.

이러한 계기로 그녀는 본인이 직접 느꼈던 교육제도의 모순과 여성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현장에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이후 1987년 교사협의회가 조직되어 그녀는 전국적인 교사운동 현장에 뛰어들었다. 또한 1989년 전교조 광주지부에 가입하여 교육현장의 부당함을 알리려 했지만, 해직 당하는 시련을 겪어야했다.

하지만 1994년 해직교사들이 다시 복직하게 됐고, 1999년에는 전교조 광주지부의 지회장선거에서 지회장으로 당선되면서 여성들의 사회활동의 발목을 잡고 있는 가사노동, 육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정현애 의원은 좀 더 현실적으로 여성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여성도 이제는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

그리하여 지난 2002년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지방선거에 출마하여 지금까지 광주시 시의원으로 활동하며 여권신장을 성취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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