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37> 80년 5월 녹두서점 지킨 여성운동가 정현애(1)
<광주전남여성운동사37> 80년 5월 녹두서점 지킨 여성운동가 정현애(1)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8.22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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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대 부조리함 느껴 여성운동가로 성장

80년 오월을 지켜온 여성운동가 정현애씨를 만나기 위해 광주시의회를 찾았다. 지난 21일 시의회 2층 202호 사무실에서 만난 정현애 의원은 오전에 광주지역 518인 여성선언 일정을 마치고, 잠시 숨을 고르고 휴식중이었다.

최근 국정원과 검찰, 경찰, 새누리당 등 국가기관이 총동원되어 부정선거를 치렀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등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등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광주 우체국앞 규탄발언에 참여한 것이다.

그렇게 현재 그녀는 시의원의 직함을 갖고 있지만 5.18민주화운동을 뒷받침해줬던 ‘여성운동가’라는 명칭이 더욱 어울린다.

문학성 풍부한 어머니 밑에 자라

70년 유신체제 말기 암울한 시대에 맞서 민주청년 학생들이 모여 열띤 시국토론을 벌이던 사랑방인 ‘녹두서점’. 민주인사들이 구속되면서 청년학생들은 시국토론을 갖고, 여성들도 정보기관의 눈을 피해 발맞춰 녹두서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녹두서점에서 모인 여성들은 송백회를 중심으로 화염병제작, 투사회보발간, 취사, 항의활동, 수의 준비 등을 했고 민주화운동을 뒷받침 했던 여성들의 활동 주요충지였다.

뜨거운 요충지의 주인이었던 정현애씨는 여성으로써 남다른 인생을 살아왔다. 80년 당시 녹두서점의 주인이었던 정현애씨와 김상윤(남편)씨는 정보기관에 잡혀가 조사를 받으며 폭풍철야 같은 곡마전을 겪기도 했다.

202호 사무실에서 만난 여성운동가 정현애 의원은 냉매실차를 건넸다. 그리고 여성운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녀는 전남 함평군에서 1남4녀 중 둘째로 1953년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났던 시기는 아직까지 한국전쟁의 피해와 가난이 공존하는 시기로 시대적 아픔을 겪고 자라왔다.

아들을 낳기 위해 딸을 4명이나 낳았었던 가정환경에 자라온 그녀는 둘째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딸에 대한 구박은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를 떠올리며 정현애씨는 “19살에 결혼하셨던 어머니는 평소에 문학성이 풍부해서 심청전이나 춘향전 등 글을 읽지 못하는 아낙네들, 부인들에게 읽어주시곤 했다”며 “어머니 덕분에 자연스럽게 문학적 소양을 기르게 됐고, 독서를 즐겨했다”고 털어놨다.

▲전남여고 졸업을 앞두고 정현애(맨 왼쪽)씨는 학우들과 정해숙 선생님과 함께 도서관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광주로 유학

그녀는 책을 통해 좀 더 넓은 세상과 소통했고, 넓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책을 통해 잘못 돌아가고 있는 세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생기도록 도와준 것이다.

반면 전쟁의 피해로 밥을 먹기도 어려운 환경에 처한 이들이 많았다. 그녀는 다행히 큰집과 바로 담벼락 하나 사이를 두고 살았던 터라 밥은 빼먹지 않고 살 수 있어 나이가 드신 할머니들을 챙겨드릴 수 있었다고 한다.

정 의원은 “그때 방 한 칸으로 아들, 며느리 내외와 함께 살아가는 할머니들이 우리 집에 오셔서 밥도 드시고 주무시고 가곤 했었다”며 “그때 할머니들은 애환을 담아 노랫말처럼 읊조렸던 말들 속에 여성으로 사는 게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지 느껴졌기 때문에 여성으로써 무엇인가 되어야 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1960년 함평 월야북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독서를 즐겨했던 그녀는 단연 우수한 성적으로 상위권을 꽉 잡고 있는 엘리트였다. 그래서 우수한 성적을 가졌던 정 씨는 장학생으로 광주 소재에 있는 중학교를 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여자도 크게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어머니는 광주로 유학을 갈 수 있도록 열렬한 지지를 했지만, 반대로 아버지는 함평에서도 중학교를 다닐 수 있지 않느냐고 반대의견이 충돌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의 허락으로 1966년 후기에 광주여중에 입학할 수 있게 됐다. 그녀의 언니는 장녀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생계를 이끌어 나갔지만 그녀는 더 큰 세상에 나아가기 위해 공부를 선택했다.

매실차를 마시며 정 의원은 “그래도 장학생이었는데 함평 시골의 동네 사기가 꺾어지지 않도록 ‘여자도 열심히 공부하면 광주로 교육을 위해 갈 수 있구나’라는 본 떼를 보여주고 싶었죠”라며 농담 섞인 말로 웃으며 말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장녀에 거는 기대감과 부담감을 업고서 더욱 책임감을 갖게 됐다. 언니에 대한 미안함도 잊지 않고 학업을 이어나가며 여성으로서 큰 입지를 다져야 겠다고 다짐했다.

유신헌법, 시대적 부조리로 이어져

연이은 우수한 성적으로 정씨는 1969년에 유독 깨어있는 여성운동가 출신이 많은 전남여고에 입학하게 됐다. 그리고 광주 흥사단 아카데미에 활동을 하면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을 배우고, 독립에 대한 분위기 등을 정리 할 수 있었다.

당시 고등학교시절에는 흥사단 아카데미에 빠져 학업에 소홀할 정도였다고 한다. 평소 역사를 좋아했던 그녀는 흥사단 아카데미에서 3분 스피치 발표, 토론회 등을 하고, 사회현실을 객관화시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기르게 됐다.

그리고 광주교대에 입학을 하면서 점점 불 온전했던 시대상황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노력을 하면 무엇인가 된다는 확신을 느낄 수 있었고, TV보급 시절이라 모여서 축구를 응원하는 것처럼 열정을 갖고 노력하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민청학련 등 긴급조치로 사회운동가들이 연이어 구속되어 수감됐다. 독재의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당시 이화여대를 다니며 학생운동을 하던 정현애씨의 친구가 도피생활을 하며,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의 친구는 김지하씨가 ‘양심선언’으로 사형의 위기에 처해 무기형으로 바꾸라는 투쟁을 했다.

▲녹두서점 옛 터.
그녀는 “도피생활을 하는 친구로 인해 현실에 모순을 느낄 수 있었고, 유신독재에 대한 글을 읽기 시작하며 사회의식은 더욱 단단해져갔다”며 “흥사단 이외에도 구속자협의회 등에 관심을 갖고 부조리함을 점점 느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때 다양한 사회운동을 하다 그녀는 1978년 녹두서점의 주인이었던 ‘김상윤’씨를 소개받게 되고 연인의 관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결혼 후에 그녀와 김상윤씨는 1980년 5월 녹두서점을 지키며 공수부대의 만행을 광주 시민에게 적나라하게 알렸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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