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36>풀뿌리 민주주의 본보기, 여성운동가 안성례(3)
<광주전남여성운동사36>풀뿌리 민주주의 본보기, 여성운동가 안성례(3)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8.14 14: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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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감독에서 전국 최초 3선 ‘여성의원’으로 변신

숨통 막히는 폭염을 뒤로한 채 찾아간 동명동 소재 알암 명로근 선생기념사업회 주변에는 유독 살랑살랑 시원한 자연풍이 불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땀을 식히는 듯 했다.

푹푹 찌는 더위를 함께 식히며 안성례 선생은 시대적 소명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유년시절,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위해 달려온 지난 수십 년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놨다.

남성 의원도 넘기 힘든 선거장벽 넘어

그렇다. 그녀는 전국 최초 3선 여성 시의원이다. 또한 전국 최초로 여성으로 시의회 부의장을 맡았었다. 지난 1991년 시민사회 추천으로 그녀가 시의원으로 출마 당시까지만 해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남성중심의 문화를 피해가기 힘든 상황이었다. 선거 자체부터가 만만치 않는 장벽이었다.

또한 민선 1기가 막 들어선 당시 현행법상 시의원은 무보수 명예직으로 오로지 시민들을 위해 뛰어다니는 봉사직이나 다름없었다. 현재 일부 시의원들은 의원직을 재산 축적과 호의호식하는 자리라고 보는 시선이 존재하고 있어 너무나 비교되는 대목이다.

푹푹 찌는 무더운 더위에 목을 축이도록 그녀는 기자에게 냉유자차를 건넸다. 냉유자차의 달달함은 안 선생이 이어서 말해주는 여성의원 시절 활동담을 취재하는데 흥미로움을 더해주기 충분했다.

당시를 떠올리며 안 선생은 “나는 시민대표라는 책임감과 함께 여성대표라는 책임감을 동시에 느끼며 여성을 위한 미래지향적인 사업계획을 다하려고 했다”며 “시의원으로써 다양한 활동하면서 후배 여성운동가을 만나고, 소신 있게 활동하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고 말한다.

안 선생은 80년 5.18민주화운동 직후 10년 동안 거리를 출근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진상규명을 위해 온 몸을 바친 것이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큰 자산이 된 듯 했다.

여성 관련 문제 해결책 찾아 나서

실제로 안 선생이 시의원으로 당선되고 나서 “5.18문제의 해결과 함께 생활정치의 실현이 의정의 목표이자 시의회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해 출마를 결심했다”고 당선소감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제대로 진상규명이 되지 않은 5.18은 안 선생이 의정활동을 하는 동안 늘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정부의 미지근한 태도, 상무대 부지 매각 등 참을 수 없는 일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안 선생은 지난 91년 8월 8일 광주시의회 5.18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1대 특별위원장을 맡으며 5.18 진실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안 선생의 의정활동은 5.18에만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었다. 현재 광주의 ‘여성운동가’라고 평가받고 있는 만큼 그녀의 의정활동에서는 여성들이 처해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시급했다. 맞벌이 부부의 육아고민, 여성을 위한 문화교육시설 부족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냉유자차로 목을 축이며 그녀는 “일하는 여성을 위해서 놀이방 시설이 필요해 탁아소 조례를 만들었고, 여성지도력 양성을 위해 현재 광주여성발전센터를 건립하게끔 했다”며 “ 컴퓨터 IT사업이 뜨기 시작한 90년대에는 여성들도 뒤쳐 질 수 없도록 여성 정보화교육을 마련하기도 했다”고 창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안성례 선생은 여성의원으로써 의정활동을 시작했다. 무엇보다 여성의 문제는 여성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더욱 손발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엄마로서 역할도 최선을 다해

남성의원보다 더 분주하게 뛰어다녔던 안 선생은 “여성의원들은 신념과 관심사를 함께하는 사회단체, 후원 조직 등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연대의 중요한 덕목을 갖추기 위해 여성 관련모임이 있으면 매번 좇아갔고, 각계인사들과의 만남에도 열정을 갖고 참여했다”고 떠올렸다.

또한 91년 시의원에 당선되고 가장 먼저 저소득층 시민들을 위한 시립병원건립에 공을 들였다. 몇 년이 흐르고 정신시립병원으로 사업을 지속시킬 수 있었지만 예산의 장벽에 부딪히게 됐다.

예산의 장벽은 그녀의 끈질긴 노력 끝에 허물어지게 됐다. 국회의원도 직접 찾는 일이 드문 경제기획원을 찾아가 이영탁 예산실장을 만나 정신병원 예산을 지원받아 총 27억 1천만원을 확정 시켰다. 그래서인지 안 선생은 광주시립정신병원을 보면 감회가 새롭다고 한다.

그리고 여성들의 교육을 위해 시에서 운영하는 여성회관의 부족을 절감하고 여성문화회관(현 여성발전센터)을 광주의 노른자 땅 상무지구에 설립하도록 공을 세웠다.

이처럼 쉴 새 없이 여성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 그녀의 가정생활은 어떠했을까. 안 선생은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자주하던 말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아이들이 항상 ‘우리 엄마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사회활동도 열심히 해서 너무 자랑스러워요. 이를 보고 우리도 우리역할을 열심히 해 기쁘게 해드려야해요’라고 말을 하곤 했다”고 수줍은 미소를 띠며 말을 전했다.

이렇듯 안성례 선생은 사회를 바꿔나가는 여성운동뿐만 아니라 엄마로써 아이들에게 큰 힘을 실어줬다.

멈출 줄 모르는 그녀의 열정

지금 안 선생은 젊은 시절 여성을 위해 혼신을 다한 패기 가득한 모습에서 세상을 넓게 바라보고 평온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다. 현재 그녀는 또래 연배, 후배들과 함께 동구 노인대학에서 국악교실 등을 수료하고 종업식을 갖는 등 바쁜 하루를 보냈었다고 뿌듯해했다.

하지만 안 선생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소망들이 많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그녀는 “지금 이곳은 명로근 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지만 좀 더 많은 광주시민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발걸음을 이끌어 내려고 한다”며 “이 장소를 이용해서 민주·인권의 도시 광주의 걸맞은 민주·인권도서관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계획 중에 있다”고 설명한다.

지금은 80세를 바라보는 고령이지만 안 선생의 세상을 바꾸는 작은 희망은 멈출 줄 모르고 있다. 젊은 시절 광주기독병원 간호사로 시작해서 전국최초 3선 여성의원이 되기까지 사회를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온 여성운동가 그녀에게 존경과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기 마땅하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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