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35>풀뿌리 민주주의 본보기, 여성운동가 안성례(2)
<광주전남여성운동사35>풀뿌리 민주주의 본보기, 여성운동가 안성례(2)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8.08 15: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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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희생자 치료 간호사, 여성운동가 되다

빛고을 광주의 80년은 대부분 시민들이 비극적인 주인공이 되는 상황이었다. 군사독재정권으로 민주화를 외치던 전국적인 시민들의 염원과 함께 정당하게 민주화를 외치던 '광주'만 총알받이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5.18민주화운동은 북한 소행이라고 역사왜곡을 하는 세력들이 남아있다. 최근 전두환 미납추징금 사건은 검찰 압수수색을 지켜보는 이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 정도다.

이로 인해 ‘통장 잔액 28만원’이라는 말이 5.18 관련자들과 유가족들에게 말도 안 되는 거짓이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줬지만 쓴 웃음을 짓게 만든다.

민주투사로 만들게 한 독재정권 만행

5.18을 겪었던 광주 여성운동가 안성례(76) 선생 역시 “전두환 정권의 비상계엄령으로 발생했던 5.18은 헤아릴 수 없는 피해자를 만들고 이제 와서 사필귀정이라는 말을 절감하게 한다”며 “이것은 자업자득이고,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하고 삼천교육대에서 비웃음을 당했던 것들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진실은 밝혀지고 죄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명로근 선생기념사업회’에서 만난 안 선생은 "남편의 구속이 나를 ‘투사’로 버틸 수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됐다"고 말한다.

광주의 80년은 어둠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작전명 ‘화려한 휴가’로 공수부대와 계엄군이 진압했던 빛고을 광주는 수많은 사망자와 수천 명의 유가족의 슬픔으로 가득했다.

당시 안성례 선생은 광주기독병원에서 간호감독으로 근무중이였으며, 그 참혹했던 실상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기독병원에서 일하고 있으면 정말 국민을 지켜야할 군대가 국민을 이렇게까지 구타해도 되는 건가라는 너무하다 생각이 들었다”며 “구타당한 환자부터 자상, 총상을 입은 환자뿐만 아니라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이들이 쏟아져 들어왔었다”고 회상한다.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린 희생자들로 인해 병원에는 피가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광주시민들은 모두 한결같은 마음으로 긴 헌혈대열에 장사진을 쳤고, 덕분에 희생자들을 치료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진상규명 위해 다양한 활동 펼쳐

안성례 간호감독은 그렇게 ‘아직 광주사람들은 죽지 않았구나!’라는 생각도 잠시, 떠올리기 가슴 아픈 일을 겪게 된다. 기독병원에서 시민군을 위해 헌혈을 하고 돌아간 지 1시간을 채 넘기지 못한 여고생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병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한 명이라도 다친 시민들을 위해 정신없이 치료를 했지만 그 여고생을 본 순간 힘을 잃고 망연자실하게 된 것이다. 이뿐만 아니었다.

병원을 찾아온 한 부인은 아이를 낳기 위해 분만실을 들어가지만, 남편은 계엄군에게 총을 맞아 수도 없이 박힌 총탄을 제거하기 위해 수술실로 들어가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녀의 남편 명로근 선생 역시 전남대 학생들이 계엄군에 맞서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어 교수들과 함께 나서게 됐고, 구속당하게 됐다.

그래서 안성례 선생의 80년대 시절은 ‘안순해’로 통하기도 했다. 이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장을 맡으면서 5.18 구속자 가족들과 함께 왜곡된 진상규명을 위해 ‘광주 구속자를 석방하라’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싸우게 됐다.

81년부터 수년 동안 진상규명을 위해 맞서 왔던 일은 해외취재 기자와 다양한 항쟁자료를 근거로 광주의 숨겨졌던 진실이 밝혀지게 됐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규탄예배도 이어지기도 했다.

한편 안 선생은 힘든 기나긴 여정 속에서도 본업이었던 간호사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80년대 활동시절을 떠올리며 그녀는 “깜깜한 밤에 야간근무를 하고 있을 때도 안기부의 감시를 받으면서 힘들기도 했다”며 “이외에도 항상 낮이나 밤이나 형사들이 4명이나 붙어 다녀서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고, 근무 시간에는 동료들에게 미안함 때문에 더욱 열심히 했었다”고 말한다.

5.18유네스코 등재, 너무나 감격

결국 지난 1989년에는 5.18청문회가 열리면서 진상규명을 통해 책임자 처벌에 한발 다가갔지만 직접적인 사망자 이외에 피해 가족 여성들의 입장에서 보상을 받기는 힘든 현실에 처해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싸워왔던 어머니, 아내, 가족들에 대한 보상은 지난 2006년 동명동 ‘오월어머니집’을 개관하게 했고, 5.18을 겪었던 여성들의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달래주면서 소통의 장이 되고 있다.

그 선봉장 위치에는 안성례 선생이 지난 6년간 오월 어머니집을 이끌어가는 첫 관장을 맡고 다양한 여성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오월 어머니집 앞에서 만난 안 선생은 “지난 2012년에는 드디어 5.18민주화운동이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세계가 기억해야할 기록문화유산으로 인정받게 됐다”며 “유네스코 등재가 되도록 활동한 것이 가장 큰 보람을 얻을 수 있었고, 수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고 설명한다.

5.18관련 진상규명활동 이외에 안성례 선생은 지난 91년부터 시민사회단체 추천으로 여성의원이 되면서 정치의 길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이후 안 선생는 여성과 복지, 보건문제를 그들의 입장으로 생각하면서 수많은 정책들을 펼치며, 여성운동을 더욱 활발히 했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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