욤비토나 가족, “피부색 달라도 한국사람 다 됐어요”
욤비토나 가족, “피부색 달라도 한국사람 다 됐어요”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8.07 23: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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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반 걱정 반 앞서는 새로운 광주생활
무국적 막내딸, 예방주사·병원치료 어려움 겪어

▲광주로 이사온게 된 욤비토나 가족들
지난 2002년 중국을 통해 한국으로 오게 된 콩고민주공화국 왕자출신 난민 욤비토나. 그의 한국생활은 벌써 11년째다. 처음 홀로 한국에 왔을 땐 공식적인 난민으로 인정받기조차 어려워 6년 동안이나 사랑스러운 가족들을 보지 못했다.

욤비는 간절한 기다림 끝에 지난 2008년 2월 난민으로 인정받게 되고, 그의 사랑스러운 가족 아내 넬리부탈라(36), 첫째 라비토나(15), 둘째 조나단 토나(14), 셋째 파트리샤 토나(12)와 드디어 함께 살 수 있게 됐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욤비의 귀여운 막내딸 아스트리드 토나(1)까지.

그렇게 욤비네 가족은 총 여섯명이다. <시민의소리>는 광주대 조교수로 임용된 욤비 토나와의 인터뷰(8월5일자 634호)에 이어 광주로 이사 온 지 갓 1주일이 지난 욤비씨네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광주에 적응해가는 욤비네 가족

욤비는 “아직 광주 사투리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데 들어보고 싶어요”라고 궁금증이 가득해 보였다. 그리고 욤비네 가족은 피부색만 다르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스럽게 광주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다.

김치찌개 등 한국 음식을 잘 먹는 것은 물론 아이들을 데리고 집주변을 산책하는 모습도 영락없이 한국인이다. 하지만 욤비는 광주에 새로운 둥지를 틀고 아직은 기대 반 걱정 반인 듯한 모습을 보였다.

욤비의 아내 넬리부탈라는 콩고에서 목사인 아버지 아래서 자랐다. 그래서 넬리부탈라는 평소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며 주로 지내왔기 때문에 차분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졌다.

하지만 아내는 부끄러움도 많아 한국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아직까지 한국말이 서툴다. 한국에 처음 와서는 허리디스크로 큰 고생을 했다.

그때 당시를 떠올리며 욤비는 “처음에는 아내가 아이들보다 오랫동안 콩고에서 살았기 때문에 한국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많이 힘들어 하기도 했고, 허리디스크로 많이 아파 입원을 계속하는 상황까지 갔었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막내 아스트리드를 낳고 나서 걱정해준 가족들의 기도때문인지 신기하게도 허리디스크는 말끔히 사라졌다고 한다.

항상 집에 있는 귀여운 막내딸을 보기위해 일찍 귀가하는 그는 “아내가 건강도 회복하면서 많이 활동적으로 변하고 있어요. 지금 아내는 일을 너무 하고 싶어 하지만 아직 어린 막내도 있고, 외국인이나 난민 아기를 안심하고 돌봐주는 환경이 아직은 열악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에서 막내랑 '뽀로로'를 보면서 지내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사소하게 어려움 겪을 일 많아

한편 욤비의 막내딸 아스트리드는 아직 무국적이다. 때문에 병원 치료나 평소 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국적인 이유는 한국은 외국인이 한국에서 아기를 낳아도 국적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욤비는 한국으로 들어온 난민이기 때문이다.

콩고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서 6개월 안에 출생신고를 해야 하지만 난민인 상황에 처한 욤비는 아직은 콩고 본국과 접촉할 수 없기에 결국 아스트리드는 태어난지 6개월을 훌쩍 넘겨버렸다. 그래서 욤비는 항상 미안함과 안쓰러운 마음을 갖고 있다.

인천에서 중학교와 초등학교를 다녔던 라비와 조나단의 학교문제도 어서 해결해야할 문제다. 아직은 방학기간이지만 곧 다가올 개학에 맞춰 두 아들들의 학교도 전학을 시켜야 하지만 다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하는 아이들 생각에 걱정이 앞선다.

욤비의 큰 딸 파트리샤는 아주 어린 시절에 아빠와 헤어지게 돼서 한국에 와서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는 “파트리샤는 태어나서부터 아빠를 못 봐서 나를 기억 하지 못해 한국에서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엄마만 찾았지요. 하지만 지금은 반대로 바뀌었어요. '아빠 배고파, 아빠 나 여기 아파' 이렇게 이제는 저를 찾아요. 파트리샤는 삼겹살을 제일 좋아해서 토라져 있다가도 ‘아빠가 삼겹살 사줄께’라는 말만 하면 활짝 웃는 아이에요”라고 영락없는 ‘딸바보’ 모습을 보여줬다.

한국 땅에서 사는 동안은 '한국인'

그렇게 욤비네는 새롭게 광주 생활에 적응해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욤비는 공식적으로 난민으로 인정됐지만 국적을 바꾸진 않는다. 언젠가는 콩고의 상황이 좋아지게 되면 그토록 그리워하던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외국인 인권운동가로 열심히 활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욤비는 “예를 들어 태풍이 발생해서 수해 복구작업에서 인력이 필요하면 한국 사람들은 ‘이건 한국 사람들 일, 문제야. 외국인이 관여할 일이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국적, 인종에 구별 없이 모두 한국 땅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다같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 난민 인권 이외에 다양한 인권도 존중받을 수 있도록 광주에서 다양한 인권 활동을 하고 싶다며 덧붙여 말하고 새롭게 시작한 광주 생활에 아름다운 청사진을 그렸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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