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34>풀뿌리 민주주의 본보기, 여성운동가 안성례(1)
<광주전남여성운동사34>풀뿌리 민주주의 본보기, 여성운동가 안성례(1)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8.01 0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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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비박산 시대 상황 속 성장한 ‘여성운동가’

▲동구 동명동에 위치한 알암 명로근 선생 기념사업회
푹푹 찌는 무더운 여름철에 갑작스럽게 내리는 소나기는 무척이나 반갑다. 지난달 31일 풀뿌리 민주주의의 본보기, 살아있는 인권·민주의 역사책이라 불리는 안성례(76) 여사를 만나기로 해 그 설렘은 더해갔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동구 동명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장등로터리 부근에 위치한 ‘알암 명로근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만난 안 여사는 아직까지도 성숙하지 못한 사회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 보였다.

최근 발생한 NLL녹취록 공개 사건, 전두환 미납 추징금 등 불편한 진실들이 하나 둘 밝혀지면서 기사를 읽고 있던 안 여사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안타깝기만 하다고 말했다.

▲알암 명로근 선생기념사업회에서 만난 안성례 여사
독립운동가 지원하는 환경 속 자라

그녀는 80여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숱한 장벽에 부딪히며, 그 장벽을 무너트리기 위해 맞서 싸워왔다. 여성의 사회적 입지가 정착되기 이전부터 여성운동의 기반을 다졌다.

80년 5.18을 경험했던 그녀는 故명로근 교수의 아내로만 살아 온 것이 아니다. 그녀는 여성특별위원회(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전신), 민주화운동실천가족협의회 이외에도 다양한 의정활동으로 전국 최초 3선 여성시의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광주·전남 여성운동의 산실이었다.

안성례 여사는 아버지 안기만씨와 어머니 정인요씨 사이에서 3남 3녀 중 다섯째로 지난 1938년 3월 11일 전남 함평군 월야면 예덕리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고향은 어린 시절부터 그녀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환경으로 남달랐다. 그 시절 예덕리는 안 씨들의 집성촌으로 모든 마을사람들은 독립 운동가들에게 자금을 후원하는 등 묵묵하게 지원해주는 마을이었다.

그러한 환경 속에 자라온 터라 그녀는 자연스럽게 독립운동, 민족·사회의식을 갖고 자라왔다.

당시 “여자는 미련한 듯해야 한다”라는 지론을 가졌었던 향교 전교 출신 아버지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945년 함평 월야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때 당시까지만 해도 여성이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위험하다고 느낄 정도로 보수적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던 안 여사는 “어렸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일본어 교육도 받은 것이 떠올라. 그때 당시 일본의 부당함은 말도 하지 못할 정도였지”라며 회상한다.

안 여사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민족 모두가 염원했던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게 됐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1950년 우리나라는 6.25전쟁을 겪으면서 풍비박산 시대 상황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안 여사는 “6.25를 겪으면서 학교이며, 집이며 모두 불타버리고 소중한 가족들도 죽음을 직면하게 되고 암울한 시대를 살았었어. 오빠도 잃고, 엄마도 잃으면서 그때 생각이 드는 게 ‘아!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라고 털어놓는다.

보수적인 아버지와 수차례 마찰

이후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포부를 가졌던 안 여사는 여성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전남여중에 합격을 하고 주변 사람들의 칭찬 속에서 자라왔다.

하지만 보수적이고 엄격했던 아버지는 달랐다. “여자는 너무 튀면 안 된다. 순리를 따라야 한다. 모난 짓 하면 당하게 돼있다”라는 염려 속에 중학교 진학을 반대했었다.

결국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친척집에 지내야 한다는 조건으로 그녀는 광주로 유학을 오게 됐다. 그렇게 유교적인 사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며 지내왔던 그녀는 중학교 졸업이 다가오자 아버지와 또 한 번의 마찰이 겪게 됐다.

당시 아버지는 “여자가 이 정도 교육을 받았으면 됐어. 이제 양재학원을 다니면서 신부수업을 받고 좋은 곳으로 시집만 가면 되는 것이여”라고 고등학교 진학에 극구 반대했다.

아직까지 유교사상이 깊이 스며있던 터라 안 여사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러던 중 진학반의 선생님이 “간호고등학교를 가보는 게 어떻겠니?”라는 뜻밖에 돌파구를 찾게 된다.

그때 간호고등학교(현 전남대 의과대 간호학과 전신)는 20여명의 관비생을 모집하여 아버지의 경제적인 지원 없이도 고등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안 여사는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본인이 책임지겠다는 책임론을 들고 간호고등학교에 입학 할 수 있었다.

그러다 1957년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는 “이제는 진짜 결혼할 때인 것이다”라며 중매쟁이를 보내며 간호사라는 직업을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고로 여자는 3종의도를 지키며 결혼 전에는 부모를 따르고, 결혼 후에는 남편을 따르고, 나이 먹고는 자식을 따르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녔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보통 평범한 가정주부보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세상을 바꿔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결혼도 마찬가지로 중매보다는 연애를 통해 해야겠다 마음먹고 있었다.

▲광주기독병원에서 간호감독으로 재직시절
양호교사로 시작한 첫 직장생활

그러던 찰나에 1958년 전남대 영문학과 대학원생이었던 명로근이란 청년을 만나게 되고 풋풋한 연애를 시작하게 됐다. 영어를 잘해서 미국 유학생활을 하고 싶었던 그녀에게 젊은 영문학도였던 그는 스승 같은 존재였으며, 뜨거운 연애 끝에 1959년 결혼을 하게 됐다.

그렇게 달콤했던 신혼생활은 1960년 5.16쿠테타로 산산조각이 났다. 전남대 영문과 조교였던 명로근 선생은 군 미필자라는 이유로 강제 징집됐다. 군사정권은 미국유학을 꿈꾸었던 안성례 부부에게 허망한 물거품이 되게 했고, 남편의 실직으로 인해 어린 딸을 두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됐다.

안 여사는 마침 18학급 이상 초등학교에 양호교사를 두는 정책이 시행되면서 시험을 보게 되고 장흥 관산초등학교 양호교사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안 선생은 2여년의 교직생활을 하면서 어린 딸을 두고 온 생각에 외로움이 커져갔고, 결국 간호자격증을 내고 1964년부터 광주기독병원으로 정식으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평소 부지런함으로 능력을 인정받았던 그녀는 수간호사 1년 생활 끝에 간호감독으로 승진하게 되고, 아이를 낳고 직장생활을 하며 지내오고 있었다.

승진을 하며 더 큰 책임감으로 열심히 일을 했던 안 여사는 1969년 청천벽력의 소식을 듣게 됐다. 자궁암 진단을 받아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오랜 신앙생활을 해왔던 그녀는 매일 같이 기도를 했다.

그러다 1여년의 투병생활 끝에 그녀는 기적처럼 자궁암을 이겨내고, 아들까지 출산하여 슬하에 1남 4녀의 자식을 두게 됐다.

안 선생은 “5명의 아이들을 두게 된 것이 가장 큰 복이라고 생각한다”며 “자궁암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만큼 병원에 찾아오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더욱 보살피게 되는 든든한 힘이 생겼다”고 말한다.

군사정권 맞서싸우는 시대상황

한편 대학교수로 다시 복직했던 명로근 교수는 부당한 군사 독재정권이 어린 학생들의 의식마저 억압하려던 정책에 분노했다. 당시 군사정권은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고 맞서 싸웠던 그녀의 남편은 결국 연행 당하게 됐다.

이러한 정치 상황속에서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YMCA와 종교인들은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며 구국기도회를 준비했다.

광주 YMCA로 모이기 시작한 이들은 “구속된 민주인사 석방하라”라는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게 되고, 전국적으로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평온했던 도시 광주를 타깃으로 삼고, 작전명 ‘화려한 휴가’로 무자비한 계엄군의 진압을 통해 수천명 시민들의 희생, 무고했던 광주시민들의 학살로 큰 반발을 일으켰다. 바로 오늘날 민주주의가 가능할 수 있도록 한 광주 5.18민주화운동이다.

그렇게 안성례 여사는 5.18당시 기독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계엄군의 무자비한 구타로 희생당한 광주시민들을 보살피며, 더욱 사회의식이 강해져갔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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