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바라본 광주 근·현대 여성운동 -7
21세기에 바라본 광주 근·현대 여성운동 -7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5.23 12: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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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양곤 민주화 운동과 아웅산 수지 여사
미얀마의 민주 ‘봄날’ 오길
대한민국은 지난 50여 년간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한 나라이다. 그런 가운데 유교적 사회 환경 속에 여성은 강요된 틀에 갇혀 남성의 보조적인 역할만 하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는 그러한 역할에서 벗어나 여성만의 정체성을 찾고 국가 발전을 선도하는 당당한 역사적 주체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시민의소리>는 그동안 남성 위주의 서술에서 벗어나 광주·전남의 발전을 위해 피땀 흘린 ‘여성운동’에 대해 집중 조명해본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1회. 프롤로그 - 한국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현주소
2회. 광주 근대 여성운동의 활동 (3.1만세운동, 항일학생독립운동, 해방후 여성운동)
3회. 부산여성운동 활동 (대표 독립운동가 박차정)
4회. 광주 현대 여성운동의 활동 (5.18민주화운동, 실존인물 증언)
5회. 현재 광주전남 여성 관련 단체 활약
6회. 미얀마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현주소
7회. 미얀마 양곤 민주화 운동 (아웅산 수지 여사)
8회. 에필로그 - 여권 신장으로 여성친화도시 나아가는 광주

   
 ▲인천공항에서 만난 아웅산 수지여사
▲인천공항에서 만난 아웅산 수지여사
지난 3일 인천공항에서 양곤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웅산 수지를 만난다는 설렘이 이번 취재를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지난 1월 광주에 왔을 때 만나 사진도 찍었지만 이번은 공식적으로 찾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민의소리>취재단은 갑작스러운 행운이 찾아왔다. 수지 여사의 잦은 해외일정으로 인터뷰가 넉넉치 못하거나 틀어질 수도 있다는 현지의 답변이 있었지만 예정된 날짜에는 양곤에 수지 여사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답변을 들은 터였다.

그런데 출국심사를 끝내고 들어간 구역에서 수지 여사를 만난 것이다. 반가움에 카메라 셔터부터 누르기 시작했다. 수지 여사는 몽골 일정을 바치고 미얀마로 돌아가던 중 직행 비행기가 없어 인천을 환승공항으로 하여 귀국하고 있었다.

아직도 민주화 운동이 진행 중인 ‘미얀마’. 이 나라는 군사정권이 통치하기 때문에 압제와 탄압이 존재한다. 그 중심에 미얀마의 민주주의 봄날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여인이 있다. 바로 아웅산 수지 여사다.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한 후 여성운동에 관해 인터뷰를 요청했던 기자단이라 밝히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경호원들이 지금은 만나기로 한 날이 아니기 때문에 인터뷰가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녀의 옆에는 '임시'라는 신분증을 가진 이가 있어 다소 꺼려하는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몇 마디를 듣기 위해 말을 건넸다.

▲미얀마 양곤 인레호수 인근의 아웅산 수지여사의 자택. 수지여사가 가택연금이였을때는 정부에 의해 차량을 포함한 모든 출입이 통제되었던 곳이다.
▲아웅산 수지여사의 자택에 남아있는 철조망은 아직까지 가택연금의 아픔을 대변해주는 듯 했다.
독립운동 영웅의 딸로 태어나

수지 여사는 "미얀마도 광주처럼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었다"면서 "군사정권의 독재에 대응해 민주화를 목청껏 외쳤고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는 점을 강조했다. 광주 5.18민주화 운동은 여성들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는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5.18당시 전옥주의 차량 가두방송, 여성시민군의 활약, 송백회의 이윤정, 정현애 등 활동, 양동시장 어머니들 주먹밥 식량 제공, 간호인력 지원 등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한편 지독했던 군사 독재정권을 벗어나기 위해 미얀마에서는 시민들을 중심으로 1988년 8월 8일 ‘8888항쟁’이 발생했다. 군사정권은 계엄령 선포를 하고, 민주화 운동에 중심에 서있던 수지 여사를 국가보안법 소요선동 혐의로 20여 년 동안 가택 연금했다.

이후 세계는 미얀마에 집중했다. 수지 여사 석방 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졌고 결국 지난 2010년 가택연금 해제가 됐다. 지난해 4월 선거에서 미얀마 하원의원이 된 수지 여사는 국제적인 활동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양곤을 방문하기 전 민주주의민족동맹 NLD 한국지부 내툰나잉 대표를 통해 수지 여사와 인터뷰 일정을 잡기로 했다. 그녀는 몽골을 방문 중이었고 방문 날에 귀국할 것이지만 확실한 답변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함께 활동하는 NLD의 퓨퓨띤(42, Phyu Phyu Thin) 여성 국회의원과 인터뷰를 약속해놓기는 했다.

아웅산 수지여사는 미얀마 대표적인 독립운동의 영웅이었던 아웅산 장군의 딸이다. 아마 우리는 지난 1983년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할 목적으로 일으켰던 아웅산 테러 폭파사건이 더욱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미얀마 양곤의 아웅산 국립묘소
▲1983년 비극적인 아웅산 테러가 있었던 곳으로 이곳 역시 관광객을 포함한 모든 차량이 일체 정차할 수 없는 곳이였지만 최근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방문 이후 공원 문 앞까지는 추모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보궐선거로 야당 NLD 압승

미얀마 양곤에 위치한 아웅산 묘소를 먼저 찾았다. 양곤은 복잡한 도시였지만 묘소 입구는 꽤나 한적했다. 비록 추모탑 입구는 굳게 닫혀 있었지만 역사적인 현장에 발을 딛고 있는 자체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후 퓨퓨띤 의원 사무실로 발길을 옮겼다. 의원 사무실로 들어서자 NLD를 상징하는 깃발이 크게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고, 아웅산 장군 사진과 자택에서 찍은 듯 한 수지 여사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다.

현재 미얀마 의회는 상원, 하원 양원제로 운영된다. 그 중 하원은 440여석, 상원은 260여석으로 총 700여석에 이른다.

수지 여사는 “NLD는 지난해 보궐선거를 통해 45석 중 43명의 의원을 배출했다”며 “그중 여성의원은 13명이며 여성의 정치참여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독립운동을 했던 아웅산 장군과 킨 지 여사 사이에서 1945년 6월 19일 태어났고 2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얀마 독립을 눈앞에 두고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다.

이후 15살 때 어머니를 따라 인도 뉴델리로 이사 한 후 학교를 다녔다. 대학을 졸업 한 후에는 오랜 기간 동안 영국 유학생활을 하며, 영국인 마이클 아리스를 만나 평범한 생활을 했다. 그렇게 수지 여사는 30년 가까이 미얀마에 살지는 않았지만 유창한 버마어를 쓸 줄 알았고, 고향의 소식을 듣고 지내왔다.

▲NLD의 퓨퓨띤 의원 사무실 벽면은 NLD를 상징하는 깃발이 붙여있었다.
▲퓨퓨띤 의원 사무실에는 아웅산 장군 사진과 아웅산 수지여사의 사진이 걸려 있어 민주화를 염원하는 뜻이 깊어보였다.
아직 가택연금의 아픔 고스란히 남아

그러다 1988년 어머니 킨지 여사가 병환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귀국했다. 하지만 당시 미얀마의 상황은 군사독재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아웅산 수지는 계엄군의 발포로 무고한 시민 사상자들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반정부 투쟁의 선두에 나서기 시작했다.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목표로 NLD를 창설하여 사무총장에 취임한 수지 여사는 전국 각지를 돌며 시위와 집회, 연설을 주도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 수지 여사의 대표적인 발언이다.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은 구호와 다름 없었다. 퓨퓨띤 의원은 90년에 NLD에 입당해 수지 여사와 함께 했다. 퓨퓨띤은 수지 여사를 수행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부에 잡혀 4개월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수지 여사는 당시 정부에게는 가장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민주투쟁이 거세지자 1989년 7월20일 국가는 안전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계엄령을 선포했고, 수지를 국가보안법 소요선동 혐의로 가택 연금했다.

한편 90년 미얀마 총선에서 총 485석의 의석 중 392석인 82%에 달하는 절대다수의 의석수를 NLD가 차지했다. 그러나 미얀마 군사 정권은 선거 결과를 무효화 했고 NLD 지도부와 당원들을 투옥시켰다.

▲NLD의 퓨퓨띤(42, Phyu Phyu Thin) 여성 국회의원 사무실을 찾아 아웅산 수지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노벨평화상, 광주인권상 등 뒤늦게 받아

아직도 미얀마는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 유엔과 세계 각국에서는 아웅산 수지와 미얀마에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전 세계와 미얀마 온 국민이 염원하던 수지 여사의 가택연금 해제가 지난 2010년 풀리게 됐다. 그리고 그동안 직접 손에 쥐지 못했던 노벨평화상과 광주 인권상을 수상하게 됐다.

▲미얀마 NLD 퓨퓨띤 국회의원(42)
퓨퓨띤 의원은 “수지 여사가 가택연금이 풀리고 나서 바로 에이즈 HIV환자들 보호센터를 살펴보고 싶다고 해서 사무실을 방문했었다”며 “아이처럼 여성운동의 걸음마 단계인 미얀마가 어른처럼 성숙해 정착해가는 광주 여성운동가들이 많은 경험들로 도와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웅산 수지여사의 자택은 가택연금의 아픔이 남아 있는 듯 했다. 이곳은 수지여사가 가택연금 기간 동안 일체 차량이 진입하지 못했고 삼엄한 통제로 수지여사를 세상과 단절시켰던 곳이다.

가택연금 해제 이후 지금은 차량도 자유롭게 통행하지만 높은 담장에 철조망까지 단절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최근 3월에 수지 여사는 전당대회를 통해 당의장으로 선출됐다. 양곤에 위치한 NLD본부에 들어서자 1층에 기념품 판매장이 눈에 띄었다. NLD본부는 전 세계 외신 기자들이 미얀마에 관심을 두면서 취재를 하기 위해 자주 찾는다고 한다.

▲미양마 양곤의 NLD본부 1층 기념품 판매장
▲미얀마 양곤의 NLD 본부 2층 사무실 내부는 사전 허가 없이는 촬영이 불가능 하다고 하다. 가운데 자리는 수지여사가 앉는 곳으로 양 옆으로 NLD 간부들이 착석해 회의를 한다.
광주 협력 통해 여성 동력 이끌어내길

외부 인사들의 빈번한 방문 때문에 사전에 허가 없이는 1층 기념품, 회의실 이외에는 촬영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퓨퓨틴 의원과 NLD 한국지부의 도움으로 2층 NLD본부 사무실을 둘러볼 수 있었다.

NLD 2층 사무실은 당원 관계자들이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었고, 수지 여사는 정 가운데 좌석에 앉아 회의를 진행한다고 한다. 그리고 수지 여사가 소장하고 있는 아버지 아웅산 장군과 어머니 킨 지 여사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아웅산 수지 여사는 2015년 미얀마 대통령 선거 출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퓨퓨틴 의원은 “수지 여사가 대선에 나갈 의향이 있지만 미얀마 헌법의 경우 외국 국적 자녀가 있는 경우 대선 출마를 금지하고 있다”면서 “영국인 사이에서 아들 둘을 두고 있는 수지여사가 NLD의 대선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헌법 개정이 필요하고 인도의 여성의원이 절반을 차지하는 것처럼 법을 통과시켜서 여성정치 참여를 늘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렇듯 세계는 여성 정치참여의 길을 차근차근 걸어가고 있는 미얀마가 민주화의 봄날을 맞이하길 기대하고 있다. 인권도시, 여성친화도시 빛고을 광주도 미얀마 여성운동이 성장할 수 있도록 관심과 협력이 필요할 때다./김다이 기자

▲미얀마 양곤 제 1 야당인 NLD 본부 사무실 관계자들이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다.
▲미얀마 NLD본부 2층 사무실 내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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