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바라본 광주 근·현대 여성운동 -4
21세기에 바라본 광주 근·현대 여성운동 -4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5.01 22: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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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현대 여성운동의 활동 (5.18민주화운동, 실존인물 증언)
5월의 꽃, 다시 피어오르다
대한민국은 지난 50여 년간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한 나라이다. 그런 가운데 유교적 사회 환경 속에 여성은 강요된 틀에 갇혀 남성의 보조적인 역할만 하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는 그러한 역할에서 벗어나 여성만의 정체성을 찾고 국가 발전을 선도하는 당당한 역사적 주체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시민의소리>는 그동안 남성 위주의 서술에서 벗어나 광주·전남의 발전을 위해 피땀 흘린 ‘여성운동’에 대해 집중 조명해본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1회. 프롤로그 - 한국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현주소
2회. 광주 근대 여성운동의 활동 (3.1만세운동, 항일학생독립운동, 해방후 여성운동)
3회. 부산여성운동 활동 (대표 독립운동가 박차정)
4회. 광주 현대 여성운동의 활동 (5.18민주화운동, 실존인물 증언)
5회. 현재 광주전남 여성 관련 단체 활약
6회. 미얀마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현주소
7회. 미얀마 양곤 민주화 운동 (아웅산 수지 여사)
8회. 에필로그 - 여권 신장으로 여성친화도시 나아가는 광주

   
 
광주에 5월이 찾아왔다. 전국은 가정의 달로 도란도란 나들이를 떠나지만 광주는 숙연해진다. 2013년도의 광주 금남로 구도청 일대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공사로 하루에도 수십 대의 공사차량이 지나다니고, 아시아문화마루 홍보관이 들어서있다.

그 가운데는 80년 민주화항쟁을 함께 경험했던 구도청 분수대와 지난 태풍 볼라벤의 피해로 뿌리째 뽑혔다가 다시 소생한 150년 된 회화나무가 그대로 서있다. 그렇게 광주에 평범하고도 특별한 5월이 찾아왔다.

5월의 광주는 민주 영령들이 찾아와 금남로 일대를 가득 메운다. 시간은 33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광주의 80년은 군부독재에 맞서 여성들도 시대의 아픔을 같이하고 진정한 여성운동의 흐름을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족민주화성회에 참여하기 위해 학교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생들.
현대 여성운동의 밑거름 민주화 운동

현재 광주여성운동 담론의 장이 되고 있는 ‘오월 어머니의 집’은 오월정신을 계승하고자 동명동에 마련된 공간으로 80년을 경험한 어머니, 오월 여성의 이야기 등 책자 발간 및 국내 교류 사업을 하고 있다.

70~80년대는 군사독재정권으로 민주화를 외치는 열기가 서울지역 학생들의 진출로 각 지방까지 확대되었다. 이때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광주가 타깃이 되었던 것이다. 80년 5월 18일 전남대학교 학생들을 주축으로 일반 시민들까지 남녀노소 구분 없이 공수부대와 유혈충돌이 벌어졌다.

“광주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편안하게 집에서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우리 동생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무 죄 없이 우리 학생들과 시민들이 죽어 가는 것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나서서 계엄군을 물리치고 광주를 지킵시다.”

계엄군의 참혹했던 만행은 다름 아닌 미혼여성인 전옥주(본명 전춘심, 당시 32세)씨의 가두방송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현재 경기도에서 거주중인 전옥주씨는 광주와 5.18에 대해 상처받은 듯 말을 아꼈다.

광주와 멀리 떨어진 전 씨와 전화통화를 통해 “그동안 오보된 기사들, 장기적으로 구술하고 기획했던 5.18 자료 제작이 무산되고 중단된 후 상처를 받아 몇 년 동안 인터뷰를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상처가 크다”며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순수하게 참여했지만 음해성 소문으로 모함을 받기도 하고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고 하소연을 했다.

▲시민들과 학생들이 전남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집회를 열고 학살자의 화형식을 갖고 있다.
계엄군에 맞서 목청 높여 가두방송

▲전옥주씨
하지만 광주에 대해 깊은 애정과 한을 가진 그녀는 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정의로운 여성 시민군이었다. 호소력 있고 카랑카랑한 그녀의 목소리는 수많은 시민들을 움직이게 만들었고, 계엄군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게 만들었다.

전 씨는 가두방송을 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펼치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드디어 소형트럭에 올라타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하지만 앰프는 30분도 쓰지 못한 채 최루탄에 맞아 박살이 났다.

그때 전 씨는 순발력을 발휘해 인근 동사무소로 달려갔다. 동사무소에서 7만원을 주고 앰프를 5시까지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결국 지키지 못하고 나중에 특수공갈죄가 추가되기도 했었다.

당시 녹두서점에는 여성들 중심으로 모인 송백회가 화염병 제작, 투사회보 발간, 항의활동, 수의 준비 등을 하는 여성 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또한 양동시장 어머니들과 시내 전역에서 시위대를 위한 음료수와 주먹밥을 가지고와 힘을 실어주었다.

그렇게 전옥주는 목숨을 걸고 목이 터져라 심야방송을 계속했고, 도청 앞까지 행진했다. 그러다 시위대 속에서 “저 여자 간첩이다”라는 외치는 소리에 누명을 쓰게 되었지만 개의치 않고 가두방송을 진행했다.

▲5월의 민주영령들이 잠들어있는 국립 5.18민주묘지.
5.18 민주화 운동의 ‘알맹이’는 밀려나

하지만 끝내 그녀는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군 재판을 받아야 했다.

당시 전 씨는 “그때 연행돼서 여성으로서는 겪을 수 없는 고통을 10일간 겪었다”며 “그동안 하혈 3번을 했고, 6월에 검찰 조사를 받고 다시 광산경찰서로 넘어가 광주교도소로 넘어가 독방에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이북 모란봉에서 2년간 교육받고 남파된 간첩’으로 내몰린 그녀는 계엄포고령 위반과 내란음모 등의 죄목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아 10월 27일 광주교도소에서 옥살이를 지내야했다. 가혹한 구타와 물고문, 말할 수 없는 상처와 표현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며 온 몸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것이다.

한편 척추뼈가 가라앉고 손발이 뒤틀리는 고문으로 힘든 옥살이 끝에 81년 4월 3일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지만 전 씨는 자유롭지 못했다. 취직 하는 곳마다 안기부 요원의 미행으로 매번 직장에서 쫓겨나야 했던 것이다.

그녀는 결혼 이후 우여곡절 끝에 아픈 상처를 잊기 위해 광주를 떠났다. 요즘 전 씨는 광주 5.18에 대해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울화병 하혈 다리마비 증세 등 고문 휴유증은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다.

자신의 가두방송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아 더 죄스럽다는 그녀이다. 그녀는 “진정으로 역사의 한복판에서 온몸을 던져 불의에 맞섰던 이들은 저만치 밀려나 있고, 정작 몸으로 뛰어들지 않았던 사람들 중에서 현재 많이 배우고 대접 받는 위치에 있다고 마치 5.18에 직접 참여한 것처럼 나서는 사람들을 볼 때면 안타깝다”며 한숨 섞인 울분을 말한다.

이렇듯 가슴 아픈 상처를 남긴 광주의 5.18민주화운동은 보조적 역할에서 주체적 역할로 성장하게 만든 여성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또한 이후 여성들도 정치 참여 의식이 높아졌으며, 시민들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값진 성과를 이루게 된 것이다./김다이 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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