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31>대중가요로 항일정신 심어준 이난영(2)
<광주전남여성운동사31>대중가요로 항일정신 심어준 이난영(2)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3.07 02: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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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 만에 고향품으로 돌아온 '목포의 눈물'

▲지난 2003년에 건립된 목포 양동 이난영 생가터에 위치한 이난영 소공원.
“아 글쎄, 아직도 그 노래만 들으믄 괜시리 눈물이 핑 돈당께~”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가운데 목포 양동에 위치한 가수 이난영의 소공원을 찾았다. 난영의 생가 터를 복원하려다 좁은 장소의 제약으로 인해 소공원으로 세워진지도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왠지 모르게 홀로 서있는 이난영의 흉상이 외롭게만 보인다. 벽면에는 ‘목포의 눈물’ 악보가 새겨져 있다.

이난영 기념 소공원에서 마주친 나이 지긋한 목포 주민이 다가와 “뭐 땀시 왔당가? 소공원에 구경왔구먼, 우리 어렸을 때 힘들고 괴로웠을 때는 항시 이 노래를 불러댔었는디...혼자 부르믄 슬퍼져블제...”라고 말한다.

민족의 '망향가' 겸 '시름가'

목포 사람들은 눈물 날 만큼 힘든 일제강점기 시절에 불렸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가슴속 깊은 언저리에 차지 하고 있는 듯 했다. 목포사람에 의해 노랫말이 지어지고, 목포 출신 가수가 노래를 부른 ‘목포의 눈물’은 나오자마자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휘어잡는 시대성과 역사성을 지녔다.

▲현재 목포 북교초등학교에서 보관중인 이난영 학적부. 호적 기록상 이옥순이라고 기록되어 학적부에도 '이옥순'이라고 기록됐다.
이 노래 하나로 일제하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에게 ‘망향가’였고 전라도 사람들의 ‘시름가’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랫말에는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의 한이 깃들어 있다며 일제의 검열로 가사까지 바꿔서 불러야 할 정도로 였다.

본보 612호에서도 거론했지만 1935년 19세의 나이로 ‘목포의 눈물’로 민족의 슬픔을 달랬던 이난영은 본명은 ‘이옥례(李玉禮)’로 알려져 왔지만 호적 기록상은 ‘이옥순(李玉順)’이었다고 한다. 이는 현재 목포 북교초등학교 학적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오빠인 이봉룡(李鳳龍)이 아버지가 사망한 후 호적에 ‘옥례’로 수정했다고 한다.

이렇게 국민가수로 떠오른 난영은 22살 때 뛰어난 재능을 지닌 ‘김해송’이라는 음악가와 결혼을 하게 됐다. 김해송은 국내에 처음으로 뮤지컬 개념을 도입하고, 최초의 블루스곡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6.25 이후 홀로 자녀 길러내

이난영의 노력으로 원만하게 지속되었던 결혼 생활로 가수 활동을 하면서도 7남매를 훌륭하게 길러내는 모정(母情)도 깊었다. 이 7남매를 키우느라 가수 활동을 광복 전후 한 동안은 접어야 했다.

한편 우리 민족 모두가 염원하는 기쁨의 광복을 맞이했지만 대부분 가족들이 생이별을 해야 하는 가슴 시린 후폭풍이 닥쳐왔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난영 역시 납북된 남편 김해송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국민 가수로 스타덤에 오른 그녀였지만 혼자의 힘으로 아이들을 키워온 평범한 ‘어머니’의 모습도 지녔었다. 홀로 된 난영은 1954년 오빠 이봉룡과 함께 재능이 뛰어난 딸들을 묶어 ‘김 씨스터즈’ 여성트리오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김 씨스터즈는 미8군 무대에서 활동을 해서 식구들의 호구를 해결하기도 했다.

당시 인기가 높았던 ‘김 씨스터즈’는 미국 라스베가스로 진출하고 이난영은 홀로 한국에서 외롭게 지내야 했다. 지난 1962년 성공한 자식들이 사는 미국으로 오빠 이봉룡과 함께 건너가 새로운 생활을 시도했지만 1963년 1년만에 다시 한국 땅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러다 1965년 9월 11일 인생의 허무에 몸서리쳤던 난영은 결국 49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생을 마감하게 됐다. 당시 장례식에는 운구 행렬에 따라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그리고 3년 뒤 1968년 민족 가요를 남기고 간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목포 중앙극장에서 제 1회 난영가요제가 시작되어, 현재까지고 지속되고 있다. 지난 196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목포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를 세워 이난영의 업적을 기념했다.

문화살정책에 맞서 저항의식 노래해

하지만 일제강점기 민족의 한을 달랬던 여가수 이난영은 생을 마감하고 나서도 경기도 파주에 홀로 묻힌 채 외롭게 지내야 했다. 갑작스럽게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경기도 파주에 안치 되었지만 복잡한 사정으로 그 동안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안 돼 안타까움을 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목포 시민들은 지난 2005년 ‘이난영기념사업회’를 발족 시키고 이난영의 묘를 목포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이후 미국에 거주하는 유가족들과 합의하에 ‘목포의 눈물 가사’에도 나오는 목포 삼학도에서 지난 2006년 수목장을 치르게 된 것이다. 사후 41년 만에 고향 품으로 돌아와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활동했던 이난영은 눈물 없이 살 수 없었던 시대에 사람들의 슬픔과 애환을 달랬다. 일제의 만행에 끌려 다녀야만 했던 사람들의 탄식과 눈물을 노래로 다독여준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문화말살정책을 강화 했지만 그녀는 대중가요로 조국애를 표현해나갔고, 노래 하나로 한과 분노를 대변해 공동체 의식을 집결시켜주는 투쟁의지를 음악으로 표현해왔다.

그렇게 국민가요가 됐던 ‘목포의 눈물’이 태어날 때부터 힘든 시대와 함께 해온 탓에 70~80년대 군사독재정권의 상황과 맞물리면서 또 한 번 그 시대성을 발휘해 수많은 시민들의 입으로 불리고 지금까지도 여성·인권 운동에 불려오고 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운동으로 태극기를 들고서 만세운동을 펼쳤던 이들도 있지만 노래 하나로 전국민들의 입으로 불리도록 저항의식을 심어주었던 그녀의 활약상도 현재 우리가 본받기에 마땅하다./김다이 기자

▲'목포의 눈물'에 나오는 삼학도에는 가수 이난영을 기념하는 공원이 건립됐다.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은 세상을 떠나고 41년만에 고향품으로 돌아와 삼학도에서 수목장을 치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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