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5·18민주화 운동’과 버마 ‘8888민주화운동’
광주 ‘5·18민주화 운동’과 버마 ‘8888민주화운동’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1.31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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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아이콘, 아웅산 수치여사 광주 방문

“부패한 권력은 권력이 아니라 공포입니다.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를 부패시키고, 권력의 채찍에 대한 공포는 거기에 복종하는 사람을 타락시킵니다.”

아직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미얀마(버마)는 과거 80년 우리나라와 매우 흡사하게 닮았다. 미얀마 중심에는 민주화를 위해 투쟁에 나서는 여성 민주화 운동가가 있다. 바로 아웅산 수치 여사다.

아시아 민주화의 상징 아웅산 수치 여사는 31일 광주를 방문해 북구 운정동 5.18 국립묘지를 찾아 참배를 올리고 외국인 최초로 식수를 했다.

이날 5.18 묘역 일정을 마친 그녀는 김대중 컨벤션센터에서 지난 9년간 받지 못했던 ‘광주 인권상’을 드디어 받게 됐다. 또한 민주화 운동의 성지인 광주시는 아웅산 수치 여사에게 광주 명예시민증도 수여했다.

그동안 수치 여사는 과거 버마로 불리는 미얀마 정부로부터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지 못해 자유롭지 못했다.

이렇듯 버마의 지난 현실은 우리의 과거와 공통점이 많다. 대학생이 주축으로 일어난 미얀마의 ‘8888항쟁’은 광주의 80년 5.18 민주화 항쟁과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버마는 지난 1962년 네윈 장군의 쿠데타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이 후 국민들은 군사세력에게 무자비한 무력탄압을 겪어야 했다. 독재정권을 겪은 한국의 70-80년과 같이 군부독재로 뼈저리게 아픈 시절을 지내게 된 것이다.

이에 버마 국민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대거 나서게 되고, 전국적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 버마 독립운동가 아웅 산 장군의 딸인 아웅 산 수치는 오랜 유학생활을 끝에 어머니의 병간호로 1988년 버마로 돌아왔다.

그녀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은 일본과 영국의 식민지배에 대항하여 버마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투쟁을 했던 독립군이었다.

그 뒤로 수치여사는 버마 민주화 항쟁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리고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1988년 8월 3일 버마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같은 달 8일 시민들은 군사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양곤(수도)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8888항쟁’을 일으킨다.

하지만 시민들은 신군부에 진압되고 군부의 무차별 발포, 계엄군의 최루탄과 총탄에 맞서다 수천 명이 목숨을 잃게 됐다.

그녀는 군부의 무자비한 무력탄압을 저항하기 위해 야당 민족민주동맹(NLD)을 결성하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바로 비폭력주의를 고집하며 투쟁을 전개해 나간 것이다.

이후 야당 민족민주동맹(NCD)의 당수였던 수치 여사는 1990년 5월 국민들이 직접 몰아준 표로 총선에서 압승을 했다. 하지만 민심에 놀란 군사정권은 이를 무효화 시키고 가택연금을 시켰다.

한편 민주화를 위해 투쟁을 해온 그녀는 지난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가택연금으로 수상하지 못하게 됐다. 이같은 계기로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은 세계적으로 점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여 년간의 가택연금을 당했던 수치여사는 지난 2010년 11월 가택연금에서 풀려나면서 드디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됐다. 현재 그녀는 지난해 미얀마 국회의원 보궐선거로 당선되고 여전히 탄압적인 법률에 맞서 민주화를 이끄는 정치가로 활동 중이다.

이렇듯 광주의 5.18 역사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미얀마는 아직도 분쟁 지역에서는 민간인들에 대한 잔혹행위가 이어지고 있다. 하루 빨리 미얀마의 인권문제와 성숙한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국제적인 교류와 지원이 필요한 실정이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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