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28>여성 정치 참여 초창기 이끈 유남옥
<광주전남여성운동사28>여성 정치 참여 초창기 이끈 유남옥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1.31 0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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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기, 부녀행정 이끌어냈던 ‘여성 지도자’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보내며 국민의 권리는 물론 특히 여성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은 채 큰 혼란 속에 지내야 했다. 그러다 1945년, 민족 모두가 염원하던 8월 15일 드디어 감격적인 해방을 맞이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꿈꾸던 해방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광주·전남 여성들 은 그토록 꿈꾸던 해방의 기쁨과 함께 지위 향상을 위해 어떠한 일들을 해왔을까?

그들은 여성의 사회적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여성 지도자들과 함께 머리를 모아 조직 확대 활동을 지속해왔다. 그중 광주부녀동맹, 광주YWCA, 대한부인회 등 다양한 단체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 교육받아

▲유남옥
지난 30여 년 동안 정치적으로 꿈틀대는 부녀행정을 이끌어온 유남옥(柳南玉). 그녀는 광복 이후 사회적 보수성을 타파하기 위해 대한부인회 전남본부에서 여성운동을 실천해왔다.

유남옥은 1912년 8월 14일 경상북도 군위에서 출생했다. 본래 광주가 고향도 아니덴다 친척도 없는 타향에서 여성운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녀는 서울에서 지내오다 전남 태생인 남편을 만나 광주에 오게 되면서 여성계를 이끌어 나갔다.

어린 시절 그녀의 아버지는 주색과 유흥에 빠져있어 제대로 아이들을 돌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딸 세 명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올라가 유남옥을 1921년 숙명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꼭 딸들도 끝까지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집념으로 유남옥을 이화여자전문학교 본과에까지 진학시켰다. 당시는 여자의 입은 벙어리가 되고 눈은 장님이 되고, 귀는 귀머거리가 되는 것이 상책인 것처럼 여기던 시절이었지만 어머니 덕분에 사회적 활동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 혼자 삯바느질로 아이들을 키워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유남옥은 가정형편이 어려워지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2학년 때 중퇴하게 된다. 그러다 1933년 22살이 되던 해. 전남 태생인 오 씨를 만나 연애 끝에 결혼을 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그녀가 전라도에 내려와 살게 됐고 일찍 신문물에 눈뜬 그녀의 여성운동이 시작됐다.

전남·광주 찾아 여성운동 펼쳐

처음엔 전북 완주의 동산국민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이어나갔다. 이후 감격의 해방을 맞이하고 1946년 독립총성애국부인회 완주군 회장직을 맡게 됐다. 당시 부인회 사업은 신탁통치반대운동이었다.

먼저 그녀는 신탁통치를 지지했던 좌익들에게 피해를 입은 우익 인사들을 보살폈다. 대창으로 찔려 피를 흘리며 돌아오면 그들을 간호해주고 밥을 먹이는데 나서게 된 것이다. 좌익들의 살벌한 협박도 있었지만 이를 감수하고 굳은 결심을 한다.

유남옥은 “오직 국가와 사회를 위한 일이니 절대 몸을 사릴 필요가 없어”라며 무서움을 떨치고 더욱 소신껏 밀고 나갔다. 그러던 중 공직에 있던 남편이 광주로 전출되면서 1949년 5월 광주로 내려오게 됐다.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1948년 5·10선거를 치르면서 그녀는 여성의 권익신장에 대한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여성운동에 뛰어들게 된 것은 대한부인회 전남도본부 광주시 동지부장직을 맡고 본격적으로 여성 계몽운동에 나선 때부터이다.

유남옥은 먼저 의생활 개선사업부터 실시했다. 그동안 ‘백의민족’ 명분으로 여성들은 흰 옷과 긴 치마를 입고서 조신하게 활동해야 했다. 불편함을 덜기 위해 여자들도 활동하기 편한 색이 있는 유색 옷을 입고, 긴 치마는 밑단을 잘라내어 통치마로 개조해서 입도록 권장했다.

소신 있는 부인회 활동 전개

한편 전남은 일제 강점기부터 방직업이 활발해 여공이 점유하는 비중이 컸다. 그녀 역시 1949년 전남방직공장의 사원으로 입사를 했다. 당시에는 교육을 받았던 여성들이 얼마 없던 터라 유일하게 학교를 다녔었던 그녀는 회사가 운영하는 학교의 교사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사내에서 직원 모임의 회장직을 맡으며 경영주와 사원들의 갈등을 중재해주는 역할을 능숙하게 처리해 나갔다. 그러다 고아들의 보금자리였던 자유원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유남옥에게 운영을 맡기게 됐다.

시대 상황은 우익과 좌익의 극한 대립 속에서 결국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전쟁의 아비규환 속에서 고아들의 어머니가 되어주며 고아 5명, 자신의 아이들 4명과 피난을 함께 다녔다. 하지만 얼마 안 돼 유엔군이 이 땅을 수복하고 인민군이 물러난 후 다시 대한부인회 활동을 다시 시작하고 광주시 지부장이 됐다.

그녀는 전쟁으로 어지럽게 흐트러진 상황 정리가 급선무였다. 또한 식생활 개선, 여성의 지위향상, 성인 교육, 청소년 선도, 불량 만화 추방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녀의 헌신적인 여성운동은 여성계에 인정받아 1954년 8월에는 3대 대한부인회 전남도본부장에 선출됐다. 여성의 권위 향상을 위해 갖가진 노력을 다한 유남옥은 1950년대 말에 들어서 자유당 정치인들이 입당을 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그녀는 과감히 거절했다.

대한부인회의 일부 간부들이 정치적 활동에 개입하면서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 지지유세를 하고 다녔다. 자유당의 부정선거가 발각되면서 사회적 반발여론이 거세지자 자신의 책임이라고 판단하고 더 이상 부인회에 머물러있지 않고 깨끗하게 사퇴를 했다.

18여 년간 광주·전남 부인회 터줏대감

그러나 불과 3개월 후 전남 도지사는 그녀를 다시 찾게 된다. 도지사는 도저히 유남옥 없이는 부인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다시 부인회를 맡았지만 얼마 지나 않아 5.16 군사 쿠테타가 발생하고 모든 정당, 사회단체, 대한부인회가 해산되면서 여성운동은 또 다시 암흑기에 휩쓸려 갔다.

이후 군사정권 아래 1963년 한국부인회가 조직되면서 그녀는 전남지부장을 맡고 1981년 3월까지 18여 년 동안 한국부인회 전남지부의 터줏대감 역할을 해왔다.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그녀가 지난 30여 년 동안 무난히 여성운동을 해낸 것은 남편 오 씨의 든든한 후원 덕분이었다. 그녀가 많은 청중 앞에서 정치 연설, 계몽강연을 할 때마다 남편은 청중 속에서 빠짐없이 강연 내용을 경청을 하고 집에서 옳고 그름을 지적해주는 시간을 가졌다.

이처럼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한 초창기. 아내, 어머니로만 살아갔던 여성이 한 나라의 시민으로써 정치,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여성운동의 물꼬를 터준 유남옥을 근현대 여성사에서 재조명할 필요성이 있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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