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27>광주의 ‘테레사 수녀’ 서서평 선교사(2)
<광주전남여성운동사27>광주의 ‘테레사 수녀’ 서서평 선교사(2)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1.23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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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김없이 모든 것을 퍼주고 떠난 ‘서서평’

▲故 서서평 선교사
100여 년 전, 척박하기만 했던 이 땅에 발을 내딛은 서서평 선교사. 서서평이 바라본 조선의 땅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광주 지방 최초의 여성교육의 요람이자 선교의 근거지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남구 양림동에는 그녀가 잠들어있다. 현재 남구 양림동 소재의 호남신학대학교 내 도서관 앞뜰에 놓인 산책로를 따라 ‘고난의 길’ 65개의 계단을 올라가는 중간에 선교사 묘역이 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서서평 선교사의 숨결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이 묘역 5번째는 광주·전남에서 17~18여 년 동안 선교사업 및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았던 ‘엘리제 요한나 쉐핑’ 서서평의 묘를 찾을 수가 있다.

▲추적 추적 비오는 날에도 양림동 선교사 묘역 동산에는 서서평 선교사를 기리기 위한 발걸음이 이어졌다.
▲남구 양림동 호남신학대학교 내 선교사 묘역 5번째는 서서평 선교사가 잠들어 있다.

광주·전남 전도사업 펼쳐나가

추운 겨울에 비가 하염없이 내렸지만 선교사 묘역에는 우산을 쓴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그녀는 지난 1912년 겨울처럼 차가웠던 호남을 찾아와 차별받는 여성들을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다 세상을 떠났다.

▲서서평 선교사와 아들 요셉, 제자 박해라와 함께
세브란스 병원으로 파견 나갔던 서서평은 1919년 3.1만세운동이 펼쳐졌을 때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독립운동 도중 부상당한 조선인들의 아픔을 깊이 동정하며 치료와 옥바라지를 도맡았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독립운동에 관여했다는 올가미를 쓰게 되면서 다시 광주로 내려오고 여성교육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광주에 다시 오게된 서평은 제중원(현 기독병원) 간호부장을 하면서 전도사업을 이끌어 나갔다. 우선 1921년 진다리 교회를 비롯하여 백운교회(현 남구 광주백운교회), 봉선리 교회(현 봉선교회) 등을 설립하고 조랑말을 타고 다니며 확장주일학교를 전개시켰다.

당시 입양을 했던 아들 요셉과 함께 ‘점박이’라 불리는 조랑말을 타고서 산적이나 호랑이가 출몰하는 산등성을 넘으며 전남 일대 돌아다녔다. 시골 변두리를 찾아다니며 병든자를 돌아보고 문맹한 가정을 깨우치며 누구도 돌보지 않았던 이들의 인권에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전도사업과 계몽운동을 하면서 여성들을 위해 인신매매 반대, 축첩 금지, 공창제도 폐지 운동의 선봉에 서서 윤락여성 선도 사업을 주도하여 여성 인권 향상에 큰 기여를 했다.

이렇듯 서평은 개화기 여성계몽을 위해 몸을 바치며, 여성교육에 누구보다 앞장서며 여성들에게 주체의식을 심어주도록 만전을 가했다.

한국 최초 부인조력회 조직

▲전남대학교 간호대학 소향숙 교수
평생을 결혼을 하지 않은 몸이었지만 아들 요셉을 비롯해 팔려 나갈 뻔 했던 처녀들을 돈을 주고 구출해 13명 여자아이들을 자신의 딸로 삼아 새 삶을 찾게 도와줬다.

한편 서서평 내한 100주년 기념 사업회를 준비했었던 대한종양간호학회 소향숙 전 회장(현 전남대 간호대학 교수)은 “가장 존경하는 나의 멘토는 서서평 선교사라고 말할 수 있다”며 “당시 미약했던 여성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해 불굴의 의지, 굽히지 않은 투지를 지닌 서서평 정신은 지금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다”고 설명한다.

서평은 그러한 과정에서 미국처럼 부인조력회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22년 12월 전국 최초로 한국 부인조력회를 조직하게 됐다.

그리하여 창립총회에서 서평은 초대 회장부터 눈감는 날까지 회장 역을 맡으며 광주의 부인조력회를 시발점으로 전국단위로 성장해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1923년에는 한국 여성간호사들을 모아 조선간호부회(대한간호협회 전신)를 창립을 하고 초대 회장직을 맡게 된다. 이를 통해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한 여자아이들이 유흥가나 기생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을 교육하여 훌륭한 간호사로 길러냈다.

한편 서평의 또 다른 눈부신 업적은 여성들의 문맹퇴치와 계몽을 위해 한국 최초 여자신학교를 세운 점이다. 당시 시대상황은 여성들에 대한 교육기회가 봉쇄되어 정규교육을 받는 여성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 권리의식을 높이기 위해 사회적인 직업을 갖도록 가르쳤다.

▲1920년대 이일학교 전경
이일학교 설립으로 여성 교육사업

▲서서평 선교사는 조랑말을 타고서 나병환자를 돌보며 선교활동을 펼쳤다.
이전부터 서평의 집에서 소박맞거나 오갈 데 없는 여성들과 본인의 집에서 함께 살며 교육을 시켜왔지만 1926년 ‘이일학교’라는 정식 명칭으로 양림 뒷동산에 붉은 벽돌로 3층 교사를 짓게 됐다. 소 교수에 따르면 “당시 이일학교 위치는 현재 양림동에 위치한 신광약품물류센터 근처로 추정하지만 터를 찾아 볼 수는 없다”고 전한다.

서평이 서거직전까지 교장직을 맡았던 이일학교는 보통과와 성경과를 나뉘었고, 가난한 여학생들의 자력을 기르며 당당히 여성 교육기관으로 상당한 지위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1931년부터 1933년까지 한국인 교사로 소심당 조아라 선생도 일을 하며, 호남지역의 많은 여성 지도자를 배출해내기도 했다.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도 했었던 이일학교는 지난 1961년 전주 한예정 신학원과 합병이 되어 현재 전주 한일 장신대학원으로 이일학교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한편 그녀는 자신의 월급도 기꺼이 이일 학교를 위해 사용하면서 여학생들에게 기술을 익히도록 만들어 학비를 마련할 길을 인도했다. 특히 윤락가에 빠진 여성들을 빼내고 이일학교로 데려와 교육을 시켜 새로운 삶을 찾도록 인도했다.

하지만 조선에서 일했던 상당수의 선교사들은 건강문제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특히나 본인이 입던 옷도 불쌍한 이들에게 벗어서 줬던 서평은 한국에 와서 스프루(Sprue)라는 병으로 심한 고통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늘 물주머니를 차고 있어야 했지만 병약한 상태에서도 늘 최선을 다했다.

결국 서서평은 광주에서 만성 풍토병과 과로, 정작 본인의 먹을 것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1934년 6월 26일 숨을 거두게 됐다. 가난한 나라 조선 땅에 찾아와서 한국인들에게 모든 것을 퍼주었던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 남긴 것은 반쪽짜리 담요, 현금 7전, 강냉이 가루 2홉이 전부였다.

남구 양림동 ‘서서평길’ 지정

하지만 서평은 숨은 거둔 후에도 그 원인을 규명해 다시는 자기와 같은 환자가 없도록 의학 연구용으로 본인 장기까지 기증을 하고 떠났다. 이후 서평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추도회를 갖고, 광주에서 최초로 사회장(社會葬)을 치르게 됐다.

현대에 접어들면서 서서평 선교사의 정신을 견줄만할 여성운동가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그녀가 펼쳤던 다양한 선도 사업은 광주·전남을 빛나게 했었던 여성운동가로 추앙하기 마땅하다.

이렇듯 우리는 광주·전남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미천했던 여성에게 권리의식, 주체의식을 심어주었던 서서평 선교사의 정신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광주광역시간호사회 주최로 지난 2010년 9월 10일 남구 양림동 양림지구대 근처 공원을 ‘서서평길’이라는 명칭으로 지정한 바 있다./김다이 기자

▲광주광역시간호사회 주최로 지난 2010년 9월 10일 남구 양림동에 서서평길을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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