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청빈한 선비
조선 시대의 청빈한 선비
  •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 승인 2012.12.20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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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석무 이사장

현재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는 나주 정씨(羅州丁氏)들이 세거하던 곳으로 큰 학자들이 연달아 태어나고 고관대작들이 줄이어 활동하면서 기호(畿湖)지방 남인(南人) 명촌으로 이름이 높던 마을이었습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선배로 성호가 매우 존경하던 학자였고, 다산 정약용의 가까운 집안의 방조(傍祖)로 다산이 크게 숭모(崇慕)했던 학자였던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의 고향마을이 바로 그곳입니다. 우담의 후손에는 학자도 많고 고관도 많았지만 현손(玄孫)인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1723-1801)가 특별히 큰 이름을 날린 학자이자 고관이었습니다.

  18세기 정조(正祖)의 치세에 큰 도움을 주었던 남인계 인물들이 많았지만 유독 이름이 높았던 분은 번암 채제공과 해좌 정범조 였습니다. 영의정에 올라 정조를 보필하고 후배인 다산 같은 신진사류를 돌봐준 번암이야 명재상이었지만, 정범조는 그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고 예문관 제학(提學)에 올라 학문과 문장도 뛰어났지만 청렴하고 단아한 인품 때문에 더욱 추앙을 받았던 분입니다. 1799년 일세의 명재상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자, 중론에 의해 정범조가 친구이자 동지이던 입장에서 채제공의 신도비(神道碑)의 비문을 지었던 것만으로도 정범조의 학문과 문장의 수준을 증명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채제공의 비문을 받으러 가던 때의 이야기가 다산의 글에 나옵니다. 제목 하여 「해좌공유사(海左公遺事)」라는 글입니다. “정조 경신년(1800) 여름, 나는 채제공의 아들 채홍원(蔡弘遠)과 함께 법천(法泉)에 갔는데 해좌공이 손을 붙잡으며 기쁘게 맞아주셨다. 그때 집안사람이 벽장의 시렁 안에서 종이 한 묶음을 꺼내 가지고 나가니, 공은 빙그레 웃었다. 내가 찬찬히 살펴보니, 대체로 식량이 떨어진 지 몇 일된 형편이었다. 종이를 팔아 70전을 얻어서 쌀을 사고 말린 고기 한두 마리를 사서 손님들을 대접해주었는데, 그 종이는 비문(碑文)이나 비지(碑誌)를 청하는 자가 폐백으로 가져다준 것이었다. 그런데도 공은 태연한 모습이어서 채홍원 또한 깜짝 놀라 탄복하였다.”라는 대목은 해좌공의 청빈한 삶이 그림처럼 그려진 글의 내용입니다.

  80에 가까운 나이에, 판서를 지냈고, 문장과 학문으로 일세의 존경을 받던 국가적 원로의 살림 형편이 그런 정도였지만, 아무런 어색함 없이 젊은 손님들을 대접해주던 그 모습, 청빈을 즐기며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에 만족하던 옛 어진 이들의 모습이 너무나 부럽게 여겨지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도(道)를 걱정해야지 가난을 근심해서는 안 된다(君子憂道 不憂貧)”고 거듭 강조했지만 그런 교훈을 지키는 선비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의 반증이기도 합니다.

범죄자를 수사하고 기소하여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할 검찰의 간부가 뇌물죄를 저질러 구속되었다는 보도를 보면서 오늘의 고관들은 왜 청빈을 즐길 줄 모르는지, 새삼 의문이 제기되어 다산의 글을 인용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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