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 22>한국의 독립여성운동가 김마리아(2)
<광주전남여성운동사 22>한국의 독립여성운동가 김마리아(2)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2.12.13 0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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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독립, 그토록 염원했던 여성 열사

"나는 조선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것이다."

일제의 추악한 지배를 받던 시절.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있었기에 독립을 갈망하는 열정에 불이 붙어 1919년 3.1운동까지 이어오게 된다. 그 중심에는 여권신장을 향상시키기 위해 여성의 신분으로 조선독립청년단에 참여해 일경의 눈을 피해 독립선언문을 몰래 숨겨온 숨은 공로자 '김마리아' 선생의 일대기를 좀 더 살펴보자.

본관은 광산으로 본명은 김진상(金眞常), 김근포(金槿圃)라고도 했던 김마리아 선생은 전국적인 항일여성조직으로 확대된 애국 부인회를 두루 돌아다니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 구국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분이기도 하다.

숨겨왔던 독립선언문 배포

독립의지가 남다른 동경 유학생이었던 김 선생은 일전에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관계로 은밀히 2.8독립선언문을 배포할 장소로 '광주'를 결정했다. 바로 수피아의 여학생들이, 광주의 여성들이 3.1만세운동과 항일운동에 대거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성권위 향상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었던 여성운동가 선생님들의 가르침 속에서 자랐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만세시위가 펼쳐지고 결국 일경의 조사가 시작되어 배후 지도자로 김 선생이 지목되어 일경의 무자비하고 혹독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녀는 모진 고문을 당해도 "아무리 나를 고문한다 해도 내 속에 품은 내 민족, 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너희가 빼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맞서며 이겨냈다.

당시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그녀는 "일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고문했는지 물과 고춧가루를 코에 넣고 가마니에 말아서 때리고 머리를 못 쓰게 해야 이런 운동을 안 한다고 시멘트 바닥에 구둣발로 머리를 차댔지"라며 6개월 동안 갖가진 고문을 감수해야했다.

결국 8월 4일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예심 면소결정으로 다음날 석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김 선생은 이때 당한 고문으로 몸이 상한 뒤 후유증이 생겨 지울수 없는 상처로 남아 평생 동안 건강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서울 보라매공원의 김마리아 동상
독립 위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결성

출감 이후에 더욱 강인해진 그녀는 독립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해왔다. 김 선생은 20여명의 여성 지도자들을 모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비밀리에 결성하여 "국민 모두가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라를 보존할 수 없으니 우리 부인들도 국민 중 한 분자로서 빼앗긴 국권과 인권을 찾기 위해 전진하자"라고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같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 확대 작업에 들어가고 2천여명의 회원을 확보한 후 비밀리 독립운동 자급 수합활동을 벌여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또 다시 일경의 눈에 발각됐던 옥살이를 했던 그녀는 병보석으로 1920년 5월 출감하게 됐지만 건강악화로 상하이로 망명을 계획하게 된다.

그곳에서 동경에서 못 다한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1923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게 되자 그녀는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참석하고 임시정부 법통성의 고수와 유지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지만 더 큰 배움이 필요한 그녀는 같은 해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한편 김 선생은 그곳에서도 교포들에게 독립운동 상황을 자세히 알리고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1928년 황애덕(黃愛德), 박인덕(朴仁德)과 함께 여성독립운동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해나갔다.

광복맞이 못한 채 눈 감다

그렇게 독립운동에 열을 올렸던 그녀는 1933년 귀국을 했고 여전히 일제의 감시와 압박이 있었지만 일제의 국민의례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불굴의 의지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미혼이었던 그녀는 결국 오랜 감옥생활로 인해 쇠약해진 몸으로 조국 광복을 맞이하기 불과 1년을 앞두고 1944년 3월 13일, 52년간 일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나게 됐다. 이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으며 서울 보라매공원에는 김마리아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이렇듯 암흑 같았던 일제 강점기 시절. 결혼도 하지 않은 약한 여성의 몸으로 오직 '자주독립'을 하겠다는 일념하나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김마리아 선생의 일대기가 우리민족 가슴속에 영원한 등불로 남아 기억되길 바란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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