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11>광주의 유관순, 최현숙 독립투사(2)
<광주전남여성운동사11>광주의 유관순, 최현숙 독립투사(2)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2.08.23 0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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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정신 투철, 광주 최초 '여기자'

▲최현숙 선생의 삼남 김양균 변호사 사무실에 가면 벽면 한쪽에 故 최현숙 선생의 흉상 원본을 볼 수 있다.
16세 어린 소녀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을 펼쳤다. 최현숙 선생은 우리 빛고을 광주에서 몇 안 되는 여성 선각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녀는 독립운동 이외에도 여기자 활동, 후학육성, 사회봉사활동 등 광주 여성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던 인물로 조명되고 있다. 또한 ‘수피아 백년사’에도 수피아가 존경하는 인물로 최현숙 선생을 다루고 있어 여성 운동사에 귀감을 주고 있다. 최현숙 애국지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그녀의 3남인 김양균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만새운동 옥살이 이후 후학 양성 나서

그녀는 만세운동으로 옥살이 이후 1924년 3월 서울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 온 그녀는 독립운동의 정열을 이어 흥학관(동구 광산동 구시청)에서 야학교사로 활동하며 문맹퇴치운동, 주민계몽운동에 힘써왔다고 한다.

당시 여성야학의 모집대상은 10대부터 40대까지로 정해놨지만 최 선생은 누구든지 찾아오면 내쫒지 않는 뜨거운 열의를 보였다. 당시 독립운동 및 문화운동의 요람이었던 흥학관의 중심인물에는 방원 김용환 선생이 있었다.

최 선생은 이 활동 기간 중에 방원(당시 25세)선생과 인연이 되어 3년간의 연애 끝에 1924년 8월 11일 결혼에 이르게 되고, 그녀의 민족독립의지는 결혼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결혼 후 14세의 어린 시동생 김용준 열사를 부양하면서 그에게 독립의 혼을 심어주고 길러주었다.

훗날 김용준 열사는 광주고보에 입학 후 독서회 활동을 해오면서 맹휴투쟁 및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까지 항일운동을 펼친 인물로 거듭난다.

▲1924년 8월 11일 최현숙 선생과 방원 김용환 선생의 결혼식 당시 모습.
광주 최초 ‘여기자’ 활동

독립운동으로 사회가 어수선했을 당시 그녀의 부군 방원 선생은 동아일보 광주지국의 기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평소 책을 좋아하던 터라 문장력과 필체가 뛰어나 1928년부터 동아일보 광주지국 총무 겸 여기자로 임명되었고, 둘은 부부언론인으로써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바로 최현숙 선생이 광주 ‘최초’의 여기자였다. 그녀의 3남인 김양균 변호사는 “어머니는 여성언론인으로 활동을 하면서 민족지 보급,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상보도 등 아버지의 신간회 활동을 비롯해 독립운동과 민족계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었다”고 말한다.

또한 김 변호사는 “우리 11남매를 키우기엔 가산이 넉넉지 못한 상황에서 어머니는 여학교 선생과 여기자 그리고 전남인쇄소의 경영을 맡아 가정을 꾸려 나갔다"면서 "그렇게 힘들어도 어머니의 인자한 표정은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불만은 단 한 번도 표시되지 않았다”고 떠올렸다.

이윽고 민족 모두가 염원했던 1945년 8월 15일 민족해방을 맞이했다. 광복 이후에도 그녀는 여성으로써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원불교에 귀의하여 교화사업, 각종 불우사업, 청소년사업 등에 자녀들이 준 용돈을 모와 기탁을 하고, 독립기념관 건립 소식에 장롱 깊숙이 모아 두었던 돈을 꺼내 정성스럽게 봉투에 넣어 기증을 하는 사회활동을 펼쳐온 것이다.

▲1988년 남구 제석산 생태탐방로 문성중 정문 맞은편 주입구에 위치한 ‘애국지사추모동산’에 최현숙 독립비와 흉상을 건립식을 가졌다.
해방이후 여전히 ‘애국사랑’

이후 3·1여성동지회가 발간한 '한국여성독립운동사'(1980)에서 최 선생은 “감방에 있을 때 면회도 안 되고 옷도 넣어주지 않아 옷을 갈아입을 수가 없어 몸에 이가 생기면 밤마다 서로 이를 잡느라고 법석을 떨던 일이 새삼 기억이 나...”라며 “여성들은 항상 자기 본분을 지킴으로써 자손에게 복을 주어야 해... 애국하는 일이 바로 그 길이지”라고 회고의 글이 있다.

애국의 길을 당연하다고 여겨온 그녀는 자신의 활동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길 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맹활약은 65년 만인 1984년 3남 김양균씨를 통해 빛이 발하게 됐다. 1919년 만세운동으로 조선총독부 판사에게 재판을 받았던 재판 판결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1984년 당시 최현숙 선생의 삼남 김양균 변호사로 인해 세상밖으로 65년만에 빛을 발휘하게 된 1919년 4월 30일 조선총독부 판사의 재판 판결문. 당시 어린 시절의 이름은 '최수향'이었다.
얼마 안 돼 그녀는 병이 악화되어 1984년 7월 25일, 81세를 일기로 타계하게 됐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이후 1986년 12월에서야 정부는 최 선생에게 애국지사표창(대통령표창 제 66603호)을, 1990년 12월 21일에는 건국훈장애족장(제2520호)을 수여하여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됐다.

또한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최 선생의 직계자녀들은 기금을 마련하여 1988년 남구 제석산 생태탐방로 문성고 정문 맞은편에 위치한 ‘애국지사추모동산’에 최현숙 독립비와 흉상을 건립하였고, 광주시민과 후손들의 역사 학습장이 되도록 현재까지 이용되고 있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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