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저들의 만행과 아픈 기억(4회)
1980년, 저들의 만행과 아픈 기억(4회)
  • 문승훈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공동대표
  • 승인 2012.05.31 0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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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민중항쟁과 나의 재심 그리고 여한(餘恨)
▲ 문승훈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공동대표

대한민국 대통령을 비롯한 국회의원, 장차관 그리고 수많은 명망가들이 때가 되면 망월동 참배를 의례적으로 하고, 아시아문화중심도시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해도, 민주인권평화기념관을 으리으리하게 짓더라도 5월은 아직 아프다.

5월 그날 광주 거리 곳곳에서 국가폭력과 공수부대에 맞서다 두들겨 맞고 저항한 사람들의 고통이 32년이 지난 오늘에도 방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5·18기념사업은 공허한 것이다.

이제 5·18동지들은 대다수 노령화에 접어들고 최소한의 지지기반도 약화되고 있다. 1980년 5월의 상처는 아물지 않고 깊어만 간다. 어디에서도 당당히 ‘5·18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처지는 ‘5·18사람’으로서의 마지막 자존감마저 허물어뜨리고 있다.

사건 때마다 강제연행 '단골'

고통을 받아내야 할 몸과 마음에는 이제 더 이상 버틸 기력이 남아 있지 않다. 대다수가 ‘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다. 이처럼 5·18 이후의 삶은 ‘견뎌내야 하는 세월’이었다. 5·18을 잊는 것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 죽을 때까지 감내해야 하는 쓰리고 애린 상처였다.

광주고등법원은 1982년 12월 16일 나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이 형이 확정되었다. 그 후 나는 5·18광주민중항쟁 재심에 관한 것을 모르고 있다가, 무려 31년 만인 2011년 4월 4일 광주고등법원에 재심을 신청해 무죄의 판결을 구하였다.

이미 5·18관련자 재심에서 무죄를 판결한 판례가 있었기 때문에 2차례 공판만으로 2012년 2월 14일 무죄로 판결받고, 동년 2월 22일 무죄로 확정받았다.

나는 재심 과정에서 5월항쟁과 관련된 나의 1, 2심 재판관련서류 일체(A4용지 650쪽 분량)를 32년 만에 처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글은 이런 자료를 근간으로, 가능하면 내 감정을 억제하면서 작성했다.

나는 출소 후 1981년에 녹두서점을 이어받아 한얼서점을 운영했다. 전두환 정권 초반의 강경탄압 국면에서 서점은 수색영장 없이 수사기관 임의로 수시 압수수색 당하고 망을 통해 감시당했고, 나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거나 그러한 위험이 있으면 강제연행 당하곤 했다.

서점 운영은 어려웠다. 특히 1981년 전남대 9·29사건과 1982년 황금동 미문화원 방화미수사건 때에는 더욱 큰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서점은 결국 망해버렸어도 작지만 다각도로 활용되면서 광주 운동권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민주화운동 이후 교사발령 없어

이후 1984년 3월에 재복적하여 무려 11년 만인 1986년 2월에 전남대 사대를 졸업하게 되었다. 1987년 6월항쟁을 겪고 난 후 나는 학원에서 국사를 가르치면서 교직발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에 불과했다.

1988년 3월의 광양제철고(사립) 임용을 앞두고 있던 중 민주화운동 경력으로 임용이 철회되었다. 1988년 8월(날짜 미상)에 당시 전남도교육위원회(현재 전남교육청) 모 장학관(전 전남교육감, 성명 생략)이 도교위 공무원(성명 생략)을 나에게 보내와 도교위에서 면담하게 되었다.

가관인 것은 당연히 나를 교직발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공무원은 도교위가 현실적 여건에 따라 교직발령의 어렵다고 하면서 발령유보에 대한 동의를 강요했다는 것이다.

당시 발령 절차에 무지했던 나는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나는 1993년 8월 27일과 1999년 10월 14일, 2012년 2월 8일에 교직발령을 요구했지만 전남교육청은 성의없는 면피성 답변으로 일관했고, 발령을 못해주겠다고 하면서 오히려 나를 질책하는 듯 보이는 회신을 보냈다.

특히 1988년 8월 18일의 전라남도교육위원회 보안심사위원회 관련 서류 일체를 공개해달라는 나의 요구에 대해서는 오히려 “(중략) 보안심사위원회 참석자들에 대한 명단과 관련 서류는 인사 관련 보안사항이므로 공개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2012. 2. 23. 전남교육청 회신)”고 답변했다. 보안심사위원회가 무엇이며 나의 교직발령과 보안심사위원회가 어떠한 관련이 있는 지 설명을 못하면서 보안사항이라고 공개도 못하면서 발령을 시켜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나의 경력이 교직발령과 무슨 관계가 있고 왜 불이익을 받아야 하는지 등 교직발령 문제에 대해 조만간 법적인 판단을 청구하려고 한다.

'레드 콤플랙스' 비극 남아

아울러 나의 두 차례 민주화운동 경력과 오늘 처음으로 공개하는 우리 집안의 숨은 비극이 보안사항인 지 무척 궁금하다.

“2010년 6월 15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49년 5월부터 1951년 4월까지 군경의 수복작전과 부역자 색출과정에서 영광지역 주민 128명이 군경에 의해 좌익이나 빨치산과 부역자, 입산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희생되거나 연행된 후 행방불명된 사실을 밝혀내고 이를 ‘전남 영광지역 민간인 희생사건’이라고 진실규명하였다.

바로 128명 중 한 분이 숙부님이라는 사실을 중3시절 숙부님 제사 때야 알았고, 같은 사건으로 외조부님도 당하셨다. 내가 한국사를 공부하게 된 배경도 그 내력을 알고자 함이었다. 결국 우리 집안은 보이게, 보이지 않게 60년 이상을 ‘레드 콤플렉스’로 가슴앓이 해왔던 것이다.

우리에게 5월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2002년 미군장갑차에 미선이와 효순이가 깔려 죽었을 때 촛불이 세상을 밝혔다. 2004년 정부가 부안에 핵폐기장을 만들려 했을 때 부안군민이 일어났다. 인구 6만의 부안에 전경 8,000명이 진을 쳤다. 평택 대추리에 미군이 살 곳을 마련해주기 위해 정부는 1만명이 넘는 경찰과 공병대 군인 155명, 용역 900명을 투입했다.

국가권력의 잔인한 폭력과 철저한 고립 속에서도 대추리는 잘 싸웠다. 용산도 일어났다. 4대강 토목사업으로 우리의 산하를 송두리째 부수기에 우리는 반대하며 일어섰다. 제주도 강정마을도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며 투쟁하고 있다.

올 12월 19일 민생·민주·대선 승리를 위해 5월은 다시 일어서고 있는 것이다. 오월의 바람아 다시 세상을 깨워라!
[후기 : 그동안 나는 5·18광주민중항쟁 전야와 상황일지(1회, 2012년 5월 14일자 ‘시민의 소리’ 제572호), 5·18광주민중항쟁 발발과 150여일의 도피, 검거(2회, 2012년 5월 21일자 ‘시민의 소리’ 제573호)와 5·18광주민중항쟁과 나의 1심, 2심(3회, 2012년 5년 28일자‘시민의 소리’ 제574호)을 ‘시민의 소리’에 게재했다. 나의 부끄럽고 한이 많은 과거이지만 그동안 저 때문에 애달아하면서도 나를 이해하고 이끌어 주신 고마운 선후배 5·18동지와 내 가족에게 사죄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는 이를 진솔하게 기록했다. <시민의 소리>에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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