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저들의 만행과 아픈 기억(3회)
1980년, 저들의 만행과 아픈 기억(3회)
  • 문승훈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공동대표
  • 승인 2012.05.24 1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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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민중항쟁과 나의 1심, 2심

▲박관현 열사
2012년 5월 15일 오월어머니집에서 약100여 분이 참석하신 민주원로초청행사가 있었다. 나는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공동대표로서 이 행사를 준비해왔다. 정동년 선배님의 부인이신 오월어머니집 이명자관장님과 고 박관현 총학생회장의 누나인 박행순여사님을 모처럼 가까이서 뵐 수 있었다. 그분들의 모습을 뵐 때면 너무너무 기쁘다. 항상 행복하시길 빈다.

2심이 끝난 상무대 영창의 동료들은 광주교도소로 이감되거나 출소하였으며, 영창에 남은20여명 우리 모두는 1980년 12월에 3차례에 걸쳐 1심이 동시에 진행되었고, 대다수가 집행유예로 출소하게 되었다. 1심 과정에서 고교 동기로 당시 사대에 재학 중이던 배환중, 박재성은 내 행적조사 때문에 연행되어 고생했다.

나는 즉시 1981년 1월 19일 자로 전교사계엄고등군법회의에 항소(사건번호 : 81계엄고군형 항제52호)하였다. 그러나 비상계엄 해제로 군법회의 재판권이 없어져 1981년 2월 25일 자로 나의 사건은 광주고등법원(사건번호 : 81노167)으로 이첩되었다. 그리하여 1981년 8월 21일부터 공판이 시작되었다. 공판은 계속 지연되다가 1982년 9월경에 속개되었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최운용 등 5·18관련자와 신영일, 임낙평 등 전남대 9·29사건 관련자, 이선근, 홍영희 등 소위 학림사건 관련자, 송병곤 등 소위 부림사건 관련자 등 양심수 40여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이라는 말인가! 1982년 9월 23일 2심 7차 공판에서 나는 링거 주사를 꼽은 채 환자운반용 침대차에 실려 나오는 박관현 총학생회장을 5·18이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당시 5·18광주민중항쟁으로 수배 투쟁하던 박관현 총학생회장은 1982년 4월 5일 서울에서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8월부터 53일 동안 광주교도소의 비인간적인 처우를 개선하려고 옥중단식투쟁하고 있었다. 당시 광주는 이 문제로 들끓고 있었다.

박관현 총학생회장은 1982년 8월 1일부터 9월 22일까지 53일간 단식하다가 잠시 중단한 상황에서 법원은 1982년 9월 27일 1심 판결을 했고, 10월 4일 단식을 재개했다. 계속된 옥중단식투쟁으로 ‘광주의 넋, 박관현’은 전남대부속병원에서 10월 12일 새벽 2시 15분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광주는 분노했다.

53일간의 단식을 잠시 멈춘 바로 9월 23일에, 광주고법에서는 재판장 혹은 검찰의 요구인 지 불확실하지만, 나에 관한 증언을 듣기 위해 박관현 총학생회장을 소환했던 것이다. 지칠 대로 지친 만신창이 육신임에도 포효하며 재판장을 꾸짖는 그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앞이 막막하고 숨이 막힌다. 박관현 총학생회장과 유족분들께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 너무 죄송스러워 먼발치에서만 봐도 항상 가슴이 먹먹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12년 재심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박관현 총학생회장 공판 관련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82년 6월 17일 공판조서 A4용지 32쪽, 1982년 6월 21일 공판조서 A4용지 39쪽, 1982년 7월 12일 공판조서 A4용지 38쪽, 1982년 9월 27일 1심 판결문 A4용지 28쪽 등이 그것이다. 아래는 총학생회장의 공판조서 중 몇 가지를 간추린 내용이다.

문 : (중략) 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아니하고 과도정부는 유신체제의 실질적 연장에 불과하여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정상적 합법적 방법을 통한 국민의 선거로서는 김대중을 위시한 민주세력의 집권이 불가능하고... 군경에게 투석, 화염병을 투척하는 등 유혈사태를 발생시켜 점차 민중봉기로 확산시켜... 김대중 중심의 재야세력에게 사태수습을 맡김으로서 재야민주세력이 정권을 담당하리라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던가요?
답 :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과도정부가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아니하고 있다가 만약 유혈사태까지 이르게 된다면 그에 관한 책임은 오직 정부에 있다는... 김대중 중심의 재야세력이 정권을 담당하게 하려는 결심을 하였다는 부분은 검찰이 의도적으로 그와 같이 묶은 것이며 당시 그런 결심을 했던 사실이 없었습니다.(중략)
문 : 동년 5월 16일 15:00시경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광주시내 대학생 약15,000여명과 함께 집결하여 ‘계엄령 해제, 노동3권 보장, 정치일정 조속 실행’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횃불을 들고 시위한 사실이 있었나요?
답 : 예 그렇습니다.(중략)
문 : 그런 후 동월 6일 16:00경에는 동 대학 총학생회의실에서 공소 외 한상석에게 “학생회 집행부 능력으로는 미치지 못하며, 보안유지 관계도 있고 하니 교내외 시위에 관하여 기획을 전담하여 달라고 요청하고 기획실 요원으로 송선태, 박용성, 박몽구, 문승훈, 노준현 등을 선정해주어 집행부와 별도로 비밀기획실을 운영하기로 결의했던 가요?
답 :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 그와 같이 집행부와 별도로 비밀기획실이라는 공식명칭을 두고 운영했던 것이 아니라 비공식기구로서 동인 등을 선정하여 총학생회를 보좌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또한 고법에서는 당시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한상석 선배에게서도 나에 관한 증인 신문조서(A4용지 8쪽 분량)를 받았다. 다음은 그 조서 중 일부 내용이다.

문 : (중략) 왜 상황일지를 문승훈 피고인에게 주었나요?
답 : 그 당시 80년 5월 14일, 15일, 16일 전남대학교에서 계속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 17일 날이 토요일어서 곤란하니까 고향에 좀 갔다 와야 되겠다 하면서 상황일지를 문승훈에게 맡겼던 것입니다.(중략)
문 : 동년 5월 8일 13:00시경 전남대학교 대강당에서 박관현의 주도하에 약4,000여명의 학생이 집결한 민족민주화성회란 대회에 문승훈이가 참가하여 시국성토, 시위일정 발표 등을 결의한 사실이 있나요?
답 : 예 그렇습니다.(중략)
문 : 증인은 비밀기획요원으로 발탁되었나요?
답 : 증인이 상무대영창에 구속되었을 때 비밀기획실장으로 증인의 이름을 적어놓고 그 밑에 송선태, 박용성, 박몽구, 노준현, 문승훈 등을 적어놓아서 한마디로 부인했습니다. 그 비밀기획요원이라는 것은 군수사요원이 만들어낸 용어이지 총학생회에서는 그러한 단어가 있을 수 없으며 증인도 비밀기획요원으로 발탁된 일이 없으며 문승훈도 그러한 사실이 없습니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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