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워크숍, 어떤 이야기가 오가나?
들불워크숍, 어떤 이야기가 오가나?
  • 박용구 기자
  • 승인 2012.05.24 0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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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들불워크숍이 박효선을 추억함(임철우), 오늘의 문화운동에 대해 말문트기(정희섭)를 주제로 25일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사무실(광주 동구 학동 광주은행 5층)에서 열렸다.

이번 워크숍은 들불 박효선 열사를 기억하는 문화예술인 등 문화 활동 현장에 있는 활동가 및 일반 대중들이 들불 박효선 열사의 삶과 정신을 함께 공감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이날 워크숍은 이야기 콘서트 형식으로 진행됐다.

▲ 정희섭 한국문화정책연구소장
정희섭 한국문화정책연구소장은 ‘문화운동에 대해 말문 트기’에서 “문화‘운동’을 이야기한 사람이 ‘문화’운동을 말하자”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 소장은 “문화운동은 ‘문화로 하는 운동’이 아니다”고 전제한 뒤 문화운동과 문화‘운동’의 차이를 설명했다.

정 소장은 “문화운동이 문화를 변화/발전시키자는 운동, 기존 지배문화를 바꾸자는 운동(민중문화 운동), 기존 문화를 형성하는 사회구조에 대한 변혁 운동이라면 문화‘운동’은 운동을 통해 문화의 공공성을 구현하고, 운동적 실천을 통해 문화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 소장은 우리가 실용성, 이념성, 집단성, 당파성, 실천성, 전통/민족, 투쟁성, 전망, 현장성, 헌신, 연대, 자생성, 직업성 등을 잃었다면 창의성, 다양성, 개성, 개방성, 전위성, 국가/당대/세계, 생활성, 성찰, 수월성, 경영시장, 의존성, 진정성 등은 얻은 것들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토대로 “문화운동은 ‘문화’운동으로 문화의 중요성과 가치를 확산시키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문화의 진보는 진보운동의 문화가 아니다”며 “문화에서 진보란 반항이며, 전위(avant garde)다”고 피력했다.

끝으로 정 소장은 “문화의 역사는 창작의 역사가 아니라 수용의 역사다”며 “먹고 살아야 하니 문화에도 경영과 기획, 마케팅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박효선 열사를 추억하며 쓴 임철우 소설가의 글 전문이다.

친구를 추억함 

임 철 우

▲ 임철우 소설가
조금 전 무심코 손가락으로 헤아려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자그마치 14년! 따가운 햇볕 아래 붉은 만장을 껴안은 채 지켜보았던 장례식 기억이 기껏 서너 해 전 같은데, 그가 떠난 지 어느 새 그리도 많은 시간이 흘러간 것이다. 14년 세월이 좀체 실감이 나지 않는 건, 내가 여전히 그를, 그와 함께 했던 날들의 기억을 가슴에 지닌 채 살고 있는 까닭이리라.

지금 내 앞엔 ‘박 효선 추모문집-오월광대’ 책 한 권이 놓여 있다. 2003년에 나온 책 표지엔 특유의 그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응시하고 있는 친구의 얼굴이 담겨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겐 그와 단둘이 찍은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다. 사실 애초에 둘이서만 찍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여럿이 함께 찍은 사진이란 것도 대학 1학년 겨울에 동기생들과 무등산에 놀러갔을 때, 연극 공연 직후 무대에서의 단체사진, 그리고 서로의 결혼식장에서 지인들과 어울려 찍은 기념사진 정도가 고작이다. 그 많은 시간 동안 어쩌다가 우리는 나란히 사진 한 장 찍어놓지 못했는지, 그게 새삼 아쉽고 안타깝기만 하다.

대학 신입생 때 우리는 처음 만났다. 1973년 봄, 유서 깊은 문리대 붉은 벽돌 건물과 등나무 벤치가 눈앞에 떠오른다. 학과는 달랐어도 문리대 신입생이 고작 백여 명이라 서로 얼굴은 알고 지냈다. 보기 드물게 과묵하고 진지한 친구. 그에 대한 첫인상은 그랬다. 검정 테 안경에 늘 고독해 뵈고 뭔가 골똘히 사념에 젖어있는 것 같은 모습. 한참 들떠있게 마련인 신입생들 틈에서 그는 어딘가 특별해 보였고, 그 독특한 표정과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왠지 선뜻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전남대 연극반에 들어가 만나게 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말문이 쉽게 터졌다. 그해 가을 공연한 [맥베스]는 아마 피차에게 똑같이 생애 첫 번째의 연극 무대였을 터이다. 세 시간짜리 장막극인 데다 대학연극치고는 워낙 대규모여서, 여러 달에 걸친 연습 끝에 학생회관 무대에서 이틀 연속 공연을 했다. 나는 대사도 몇 줄 뿐인 일인삼역짜리 단역에 불과했지만, 그는 신입생임에도 조연급인 근사한 ‘로스 백작’ 역할을 맡았다.

지금도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다. 극 후반부에서 백작은 폭군의 군대에 의해 자신의 성에 남겨놓고 온 가족들이 모두 학살당한 걸 알게 된다. 그 비통한 사실을 동지들에게 전하는 장면에서, 백작 역인 그는 감정에 복받친 나머지 무대에서 울컥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때문에 첫 공연 직후 지도교수한테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어째선지 나는 그때 그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행여 바로 그 순간에, 그는 몇 년 후 우리들 눈앞에 닥쳐올 저 5월 광주의 운명을 은연중 예감이라도 했었던 건 아니었는지......

우리가 본격적으로 친해진 건 피차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직후였다. 어느 날 그가 강의실로 날 찾아와서는 대뜸 소설 동인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박효선, 이미란, 장종대, 임철우 네 사람이 맺어졌고, 79년 가을엔 네 편의 단편을 묶어 ‘비둘림’이라는 소박한 동인지를 냈다. 그러나 소설동인은 결국 5.18을 만나면서 끝이 나고 말았다. 훗날 그는 연극과 극작가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사실 처음엔 소설가를 꿈꾸면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글을 쓰던 문학청년이었다. 2주마다 한 번씩 산수다방이나 고려다방에 모여 서로의 작품을 놓고 열띤 얘기를 주고받던 그 풋풋한 얼굴들이 잊히지 않는다.

한편 그 무렵 그는 들불야학의 강학을 맡고, 또 마당극인 ‘함평고구마’ 극본을 쓰기도 했다. 숫제 숙맥 같던 나는 순전히 그의 영향으로 극단 ‘광대’에 뒤늦게 합류하게 되었다. 당시 ‘광대’ 단원 대부분은 전남대 학생들로, 저마다 농악이나 사물 한 가지 정도의 기예는 익힌 사람들이었다. 나는 할 줄 아는 게 전혀 없었으므로, 79년 겨울 YMCA 무진관에서 열린 ‘돼지풀이 마당굿’ 공연에서 면 직원 역을 맡아, 피켓만 들고 막무가내 뛰어다닌 게 고작이었다.

그 무렵, 돌이켜보면 나는 참 어지간히도 그와 붙어 다니면서 그를 닮고자 했음에 틀림없다. 당시 그는 내겐 친구라기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히 앞서나간 형 혹은 선배 같은 존재였다. 말이 대학생이었지 소심한 성격에 아직 세상을 보는 눈도, 분별력도 한참 부족한 우물 안 개구리인 내게 그는 더없이 고맙고 자상한 안내자였다. 돌이켜보니, 그는 나를 위한 ‘의식화교육’에 매우 헌신적이어서, 자신이 읽은 책들을 빌려주기도 하고 일부러 이런저런 운동권 인사들의 모임 자리에 끌고 나가 선배들과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극단 광대’도 그렇고, 녹두서점, 현대문화연구소, 양림동과 동운동의 황석영 선생 댁, 그리고 ‘들불야학’에도 매번 그를 따라서 드나들었다.

광천동 천주교회 부속건물에서 열린 어느 겨울밤의 ‘들불야학’ 입학식 풍경. 인근 시민아파트 좁은 방에서 윤상원, 김영철, 김상윤 등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이야기를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열심히 들었던 일. 또 들불야학에 처음 갔던 날 그의 국사 수업을 참관했었는데, 장난기 어린 시선으로 이따금씩 돌아보곤 하던 그 동생 같은 학생들의 맑은 눈빛들이며 환하고 순수한 웃음들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첫 대면하는 자리에서 윤상원 선배가 내게 영어 과목 강학을 맡아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기에 얼른 그러마고 대답했었는데, 내 사정상 이래저래 미뤄지던 끝에 결국은 5월을 맞고 말았다.

며칠 전 모처럼 망월동을 찾아가, 친구의 묘 옆에 혼자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상석에 놓인 작고 둥근 영정 속 그의 밝고 통통한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또 언제나처럼 실없는 소리를 던졌다.
“어이, 우리는 다들 이리 볼품없이 늙어 가고 있는데, 자네는 여전히 삼십대 모습 그대로이니 참 부럽구먼.”
예나 지금이나 철딱서니 없다고 못마땅했는지, 그는 누운 채 아무 대꾸도 없었다. 듬직하고 넉넉한 체구, 늘 가늘게 찌푸린 이마, 항상 어금니를 물고 있는 것처럼 꾹 다문 입매, 안경 너머로 뭔가 꼼꼼히 응시하는 눈빛, 종종 텁석부리 모습이 되곤 하던 짙은 구레나룻. 굵고 힘있는 목소리. 내 기억 속의 친구는 여전히 그렇게 남아있다.

사실 그와 나는 성격도 스타일도 전혀 딴판이었다. 숫기 없고 심약한 편인 나는 매사에 진중하고 입이 무거우면서도 강한 신념에 차 있는 그가 내심 많이 부러웠다. 천성적으로 장난기 많은 나는 늘 실없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는 사실 농담이나 우스갯소리 따위엔 전혀 재능이 없었다. 어쩌다 노력해서 한 마디 꺼내봤자 십중팔구 주위를 썰렁하게 만드는 식이었다. 그의 듬직한 성격이 부럽다고 내가 말하면, 그는 거꾸로 유머 감각 많은 내가 부럽다고 말하곤 했다.

그의 특별한 미덕은 정작 따로 있었다. 그는 나나 다른 친구들의 실없는 농담과 유머를 항상 열심히 들어주었고, 곧잘 손뼉까지 짝짝짝 두드리며 큰소리로 웃어주는 참으로 넉넉한 사람이었다. 늘썽 과묵하고 굳어 있다가도 한순간에 파안대소, 껄껄대며 즐거워하는 그 모습은 천진한 아이 같았다.

하지만 5월 이후, 그런 환한 웃음은 그에게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간혹 어쩌다 얼핏 스쳤다가도 그 웃음의 흔적은 금세 지워져버리곤 했다. 그럴 때 그의 눈가에 짙게 드리워지던, 특유의 그 알 수 없는 쓸쓸함이랄까 애잔한 그늘을 나는 새삼 가슴 뭉클하게 기억한다. 그것은 가장 빛나고 아름다워야 할 청춘의 시간을 저 어둠의 시대 한복판에 기꺼이 묻은 사람, 그 길고 긴 고통의 터널을 맨몸으로 거슬러 온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혈흔 같은 것임을 나는 알고 있는 까닭이다.

팔십년 오월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생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그날을 겪은 이후, 우리는 누구도 그날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오월은 무수한 이들의 운명을 바꿔놓고, 존재의 기반 자체를 망가뜨리고 말았다. 죽은 이들은 말이 없지만, 살아남은 이는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다. 나 역시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지켜보기만 했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에 짓눌려 버둥거렸다. 나를 미친 듯 소설에 매달리게 만든 힘은 바로 감당할 수 없는 그 죄의식과 부끄러움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작 그 친구가 그 누구보다도 크고 무거운 죄의식과 울분에 짓눌려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음을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시후에 나온 추모문집의 일기와 글들을 읽어가면서 나는 뒤늦게야 땅을 쳤다. 선배 동료들이 최후를 맞은 그 자리, 그 시간에 정작 자신은 있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가 겪어야 했을 고통과 한이 어떠했을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바로 얼마 전, 고백교회 김성룡 목사님은 병상을 찾아가 그와 함께 마지막 임종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목사님. 5월 그날 이후, 저는 단 한시도 마음 편안해본 적이 없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 순간의 짤막한 고백에 담겨 있는 의미야말로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나는 차마 두 눈을 감고 말 뿐이다.

박 효선 열사. 이제 그는 우리 곁에 없다. 짧은 생을 그야말로 한 송이 불꽃처럼 뜨겁게, 장렬하게 타올랐다가 그는 떠나갔다. 혼신의 힘을 다한 그의 무대 위에서, 그의 피와 땀방울에서 빛나는 수많은 5월극들이 태어났고, 그것들은 이제 5월정신의 찬란한 생명으로 다시금 피어나고 있다.

오월 정신을 위해 불꽃처럼 춤추고 노래하던 우리들의 광대.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그를 잊지 못한다. 그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 또한 내 생애의 더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시간일진대 어찌 그를 잊겠으며 또 쉬이 잊히겠는가. 사랑하는 친구여. 그대는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들과 함께, 우리들 가슴 속에서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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