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이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부끄러운 이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 채복희 이사
  • 승인 2012.05.17 1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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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복희 이사
1980년대 어느 때부턴가 광주시민들에게는 이상한 행동 양식이 하나 생겨났다. 그것은 매년 새해 첫날이면 무등산에 오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떠오르는 시간에 맞추어 힘차게 올라 해맞이를 하는 그런 ‘정상’(?)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때 광주시민들은 한 밤중에들 무등산에 올랐다.

사실 밤이라는 시간대는 인간들이 날짐승들을 위해 세상을 고요히 비워두는 때가 아니런가. 한밤 그들이 주인이 되고 활개를 치는 그들만의 산중에 난데없이 사람들이 무리지어 꾸역꾸역 오르는 일이 생긴 것이다.

등산을 매우 즐기는 어떤 이는 대낮같은 보름날 밤을 잡아 명산에 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경우 필히 날씨가 뒤를 받쳐줘야 한다. 그래서 야밤 산행은 사철 중 겨울이 가장 적합하지 않고 봄이나 가을 그것도 구름 한 점 없는 날이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살다보면 다 아는 일이지만 과연 그런 날이 며칠이나 되나.
그런데 광주시민들은 80년 이후 수년 동안 겨울 매서운 바람 불고 때로는 하얗게 눈 쌓인, 그래서 어떻게 보면 매우 위험할 수도 있는 밤중 산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 당시 산행을 해본 사람들은 다 안다.

누가 제일 먼저 오르는지 잘은 모르지만 뒷사람은 앞사람의 등과 발꿈치에 의지해 중봉까지 끝없는 줄을 지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이 산행에서 소란스러움이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기괴할 정도로 느껴지는 한밤중 침묵의 등반, 이윽고 중봉에 올라 군데군데 빙 둘러 잠시 쉬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다들 조용하게 가라앉아 소나무에 기대어 깊은 어둠에 잠겨있는 밤하늘을 올려다 보는 것이었다. 물론 짤막하게 속삭이는 대화들도 있었고 가져온 보온통에서 뜨거운 차를 나누어 먹기도 했다.

요즘은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그때는 나무토막을 주워 모닥불도 살라 그 주위에 동그랗게 모여 온기를 나눴다. 그렇게 해서 무등산 중봉이 군데군데 그을리기도 했지만 무등산에 불난 적은 결코 없었다. 중머리재는 원래 머리가 다 벗겨져 있었기 때문에 숲이라기보다는 마치 운동장 같은 느낌을 주었고, 나중에 권부가 산불 위험을 경고하면서 새해 밤중 산행을 통제한 것은 뭔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었다.

시당국의 본래 의도가 무엇이었던지 간에 몇년 동안 유지되었던 무등산행은 종국에는 흩어지고 말았다. 물론 그 산행은 오랫동안 지속될 만한 성질은 아니었다.

돌이켜보건대 그 짧은 몇년 동안의 야밤 산행은 광주인들의 거센 분노와 참담한 패배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 등이 응축돼 있는 묵언의 시위가 아니었나 싶다. 또 무력으로 탈취한 국가권력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철저히 고립된 광주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제의도 겸했던 것 같다.

그러나 광주사람들이 한밤 달도 없는 컴컴한 산길을 줄지어 올랐던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서로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가장 크지 않았나 싶다. 1980년 마지막 항거 날, 도청에서 함께 하지 못한 광주사람들은 살아남았음을 두고두고 부끄러워했다.

그때 눈앞에 몰아닥친 죽음의 공포 때문에 차마 나서지 못했지만 ‘생존’이란 ‘치욕’과 동의어였다. 한세대 30년의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간 2012년 오늘 부끄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권력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절절한 마음으로 광주의 80년을 추모하고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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