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장군과 주검동 대장간 <상>
김덕령 장군과 주검동 대장간 <상>
  • 김미정
  • 승인 2011.12.05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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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무등산테마 스토리텔링 시민공모전 대상 수상작
덕령은 이부자리를 밀치고 일어났다. 마을은 고요 속에 숨어 있다가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덕령이 사는 무등산자락 성안마을에는 양반들이 사는 기와집과 상민들이 사는 초가집이 무등산의 품속에 그림처럼 잠겨 있었다. 밥을 짓는지 이집 저집 굴뚝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구름이 허공을 감고 있는 듯했다. 일찍 일어난 머슴 세동이 덕령에게 문안인사를 했다.

“서방님 수련장에 가시려고 하십니까? 비가 오시려나 봅니다.”
“바람 끝이 비를 몰고 올 것 같구나.”
덕령은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하루 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큰물을 만날까 싶습니다.”
“비가 오면 비를 가르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타고 오면 될 것 아니냐”
“서방님은 농도 잘하십니다.”

덕령은 이른 조반을 먹고 활과 화살을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섰다. 삼밭골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무성한 소나무 사이로 큰 바위가 있었다. 그곳을 향해 길을 나선 것이었다. 덕령이 삼밭골로 들어서자 소나무 사이로 이슬을 머금은 풀잎들이 상쾌함을 더해주었다. 한참을 올라가니 억새가 한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다.
“벌써 억새가 꽃을 피웠구나. 세월이 무심도 하지. 나도 이제 약관의 나이가 되어가는 구나.”
덕령은 근래에 자꾸 악몽에 시달리면서 어지러운 마음이 깊어져만 갔다.

돌은 오래되어 안개구름이 촉촉하니 푸른 이끼가 꽃이 되었네
자연히 언덕과 골짜기가 바탕을 이루니 번화를 향한 뜻이 없구나

덕령은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이 시 한편을 읊었다. 그것은 김인후 선생이 소쇄원의 경관을 보면서 지은 시였다. 그런데 어디선가 갑자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서는 굵은 빗줄기가 한치 앞을 가늠하지 못하게 쏟아졌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아무도 없어요.”
덕령은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소리를 쫓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어디서 나는 소리지.’
소나무가 빽빽히 들어선 산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살려!”
다시 소리가 났다.
“저쪽이구나!”
덕령은 소리가 나는 쪽을 행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아… 저것은!”

순간 덕령은 몸을 뒤로 움찔했다.
수련을 할 때 가끔씩 만나는 호랑이가 한 사내를 물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사… 사람 좀 살려주세요.”
사내는 덕령을 보는 순간 살려달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내면서 울먹였다. 호랑이는 금방 사내를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이놈!”

덕령의 천둥같은 소리에 호랑이는 놀라 사내를 땅에 내려놓았다. 호랑이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면서 털을 바짝 세웠다.

“네가 정령 내 손에 혼이 나고 싶으냐!”
덕령은 호랑이의 기세에 물러섬이 없었다.
“네가 이곳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다. 살고 싶으면 빨리 떠나거라!”
호랑이는 무등산을 지키는 산신령의 사자였다.
덕령의 우렁찬 소리에 성산에서 잠들었던 수많은 생물들이 일어났다.
‘살았어, 저렇게 대범한 사람이 어디 있을꼬.’

덕령의 용맹스러움을 지켜보면서 사내는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 거렸던 호랑이는 점점 눈빛이 흐려졌다. 그리고 물끄러미 덕령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돌렸다. 덕령의 눈빛에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생사를 오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내는 덕령을 향해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무사하니 다행입니다.”
덕령은 죽을 고비를 넘긴 사내에게 예의를 갖추어 말을 했다.
“저는 풀무질이나 하는 미천한 몸입니다. 양반이신 것 같은데 천한 것에게 말을 높이시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하십니다.”

그럴 즈음에 하늘은 놀란 듯이 비를 거두었고, 무등산 자락너머 낮은 하늘에 무지개 다리를 놓았다.

“자초지종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치료부터 해야겠습니다. 산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저희 집이 있습니다. 며칠 머물면서 치료를 하도록 하십시오.”
“저를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몸들 바를 모르겠는데 치료라니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어디를 가려 하십니까”
덕령은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사양하는 사내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무등산의 아침을 일찍 맞은 오소리 도롱뇽들이 덕령의 뒤를 쫓고 검은 딱새는 둥지를 나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아니 서방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피를 흘리고 있는 저자는 누구입니까?”
세동은 살바위에서 무예를 닦고 있어야 할 덕령이 상처 입은 사내를 문안으로 들이자 깜짝 놀랐다.
“일이 그리되었다.”
자초지종은 다음에 말해 줄 터이니 의원을 불러오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사내는 의원의 치료를 받고 며칠이 지나 상처도 아물고 혈색도 몰라보게 좋아졌다.
“이제 치료도 다 되었으니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사내는 더 이상 폐를 끼친다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왜 무등산으로 접어들었는지 이유나 알자꾸나.”
“저는 이서에 사는 대장장이 팔봉이라 하옵니다. 지난 홍수로 집이 떠내려가 가솔들이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친척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덕령은 팔봉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느냐!
“길을 잘못 들어 산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으리께서 저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이미 호랑이 밥이 되었을 몸이었는데 이렇게 살아 있으니, 그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팔봉의 사정을 듣고 덕령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일을 하려면 저런 대장장이가 필요해. 아마 저 사람을 구해준 것은 분명 산신령님의 계시가 있어서일 거야.’
덕령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사내에게 대뜸 “칼은 만들 수 있느냐?”하고 물었다.
“네 오래 전에 스승으로부터 검 만드는 비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다 배우기도 전에 스승이 돌연 어디론가 사라져 비법을 전수 받지는 못했습니다.”
덕령은 팔봉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활활 타올랐다.

“지금 너의 처지가 딱하구나. 가솔들이 오갈 데가 없으면 여기 와서 살면 어떻겠느냐.”
“아… 아니, 그럼 저의 식구들을 보살펴 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여기 와서 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팔봉은 덕령의 말이 끝나자마자 가솔들을 데리고 오겠다면서 장불재를 넘었다. 무등산 단풍들이 수줍은 새색시 볼처럼 빨갛게 더욱 빨갛게 변해갔다. 삼밭실의 갈대들은 하얗게 꽃을 피우고 장불재와 규봉으로 가는 능선에도 억새가 장관을 이루었다. 세상의 바람들이 억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팔봉은 이서에 간지 3일만에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성안마을로 돌아왔다. 살림살이라고는 솥단지와 사기그릇 몇 개밖에 없었다. 팔봉은 덕령의 집에서 고개 하나를 넘는 곳에 살림을 차렸다. 논 다섯 마지기도 소작하게 되었다.

“세동아 팔봉이를 불러오거라.”
덕령이 부른다는 말에 팔봉은 부랴부랴 옷고름도 여미지 못하고 싸리대문을 나왔다. 팔봉의 아들 오지는 코를 벌름거리면서 애비를 따라왔다. 오지는 팔봉의 아들로 덕령보다 두 살 어렸다.
“나으리 부르셨습니까?”
“밥은 굶지 않느냐.”
“마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농기구도 만들어 주고, 농사도 열심히 짓고 있습니다.”
“그래 고생이 많구나."

평소에도 덕령은 집에서 부리는 머슴까지 챙겨주는 자상함을 보였다.

“오지에게도 풀무질하는 것을 잘 가르치거라.”
“지금도 제 옆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대장간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덕령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오지는 덕령의 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내가 너를 부른 것은 소문이 흉흉해서 불렀다.”
“흉흉하다니요.”
“요 근래 왜구들이 고을마다 들어와서 장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일본으로 데리고 간다는구나.”
“저같은 무지랭이를 어디다 쓰겠습니까?”
“아니다. 너는 풀무질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다. 분명 때가 되면 신검도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조심하도록 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오지도 몸 조심하거라.”
“첩자들이 조선 사람으로 변장을 해서 왜구를 구분할 수 없다고 하더구나. 내 말 명심하고 도공들이 사는 배재마을에 가서도 전하거라!“

팔봉은 덕령의 말을 듣고 성안마을을 지키는 버드나무거리를 지나 집으로 왔다. 마을 앞 버드나무에는 새끼로 금줄을 쳐놓았는데 치성을 드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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