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찾아서(12)
민주주의를 찾아서(12)
  • 이홍길 광주전남민주동지회 상임대표
  • 승인 2011.11.2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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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한 며느리가 자녀의 꿈을 북돋운다-
매판으로 집약된 80년 서울대 무림의 “반파쇼 학우투쟁 선언”은 전두환정권이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고 오히려 민주투쟁을 모함할 수 있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

한국은 60년대 이후 이미 수출주도형 경제가 정착함으로써 후진국 자본형성 과정에서 매판의 발생은 불가피한 것으로 양해되어 매판성 만으로 독재를 규탄하는 것은 그 실효성과 절실성이 두드러질 수 없는 시절이었다.

12월 15일 당국은 옳타꾸나하고 선언문 내용을 전면 공개하여 학생세력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계급투쟁에 의한 폭력혁명을 주장하여, 그 논리전개 방식이 유물론적 변증법과 유사하다고 지적하여 국민 가운데 미만한 보편적 반공정서를 꼬드기고 또 편승코저 하였다. 반공 고속도로를 의기양양하게 달리는 저들의 뻔뻔한 위용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자. 적에게 이익과 기회를 제공했을 수 있음을 자성하기 보다도 투쟁의 훈장으로만 빛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미네르바의 촛불”의 저자이기도 한 조정환은 “레닌과 미래의 혁명”에서 그는 80년대 후반 비합법정당 건설을 목표로 활동했음을 자술하면서 “저는 1980년대내내 볼세비키로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박노자선생과 처음 만났을 때 남한에서는 혁명가들이 왜 스탈린주의를 가지고 혁명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의아함을 표현하더군요” “그에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놓아버리지도 않았지만 당대의 사유와 실천이 그 틀과 방향을 크게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들었던 물질적 정치적 조건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지 않았나”하고 말하고 있었다.

억압과 착취속에서 돌파구를 찾는 집단들에게, 물론 억압자들이 그 기회를 줄 성 싶지도 않지만은, 점진적이고 대중 설득적 방법은 매력도 호소력도 가질 수 없었다. 손문이 점진적 방법을 요청하는 엄복에게 백년하청을 지적한 것 또한 투쟁가들의 생명력을 들어낸 것이리라. 간난신고 ‧ 풍찬노숙을 일상적으로 감내하지 않으면 안되는 투쟁가들에게 혁명의 찬연한 목표와 전사적 각오가 없다면 질국의 시간들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를 상상해보자.

민족혁명을 지향했던 계급혁명을 지향했던, 지난 세기에 어떠한 보상의 기대도 없이 요원의 들꽃처럼 살다간 의사 열사들의 삶은 우리들을 숙연하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곧장 그대로 우리들의 삶으로 반복될 수는 없다. 지금 이 시간은 이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것이며 공간적 조건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4.19 혁명 이후 혁명 엘리트들의 내적 욕구와는 상관없이 선거혁명은 제고되었지만 폭력혁명은 그 단초마저 시도되지 않았다. 80년 서울의 봄에서도 민주의 봄을 칼바람으로 짓뭉겐 억압자에 대한 가열찬 공격 대신에 서울역 회군이 이루어지고 87년 6‧10항쟁의 시기에도 노도와 같은 군중의 위용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대한 폭력적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때 그때 폭력적 공격이 이루어졌다면 우리들의 민주혁명은 보다 완벽한 모습으로 한국현대사에 그 모습을 들어냈을까? 그 예단은 역사적 가정으로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많은 인명살상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지난 시간의 이념 트라우마 지역 트라우마의 상흔도 아직인데, 새로운 트라우마를 덧댓을 것은 분명하다. 시어머니를 닮는 며느리는 옛며느리이고 새며느리는 자수성가하는 개성있는 며느리여야 한다. 그래야 자녀를 존중, 그 꿈의 방조자가 될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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