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와서 한 말들
이 세상에 와서 한 말들
  • 문틈/시인
  • 승인 2011.11.2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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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틈시인의 '세상보기'
성경에는 태초에 말이 있었다고 쓰여 있다. 그 말이 사람이 되었다고 쓸 정도로 말에 대해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한다. 말에는 내 주장에 따르면 언령(言靈)이라는 것이 있다. 말의 혼이라고 할까.

아버지는 말을 빗대어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 두 개의 천이 있는데 더러운 것을 수건이라 부르고, 깨끗한 것을 걸레라고 하면 사람들은 깨끗한 천을 쓰지 않고 그 더러운 천을 수건으로 사용한다. 그러니 말은 항상 조심해서 해야 한다." 그렇다. 말에는 혼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어느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고 노래하고 있다. 말에 혼이 있다는 뜻을 노래한 표현으로 읽혀진다. 이처럼 혼이 있는 말이기에 옛부터 말을 두고 많은 말들을 해왔다. 말로서 말이 많으니 말을 말까 하노라, 어 다르고 아 다르다, 말 한 마디로 천량 빚을 갚는다 등등.

선조들의 말에 관한 통찰은 언제 들어도 보약 같이 느껴진다. 그렇다. 때로는 말이 독약이 된다는 것을 알라는 경계의 말이다. 그래서 서양속담에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전해오는지 모른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평생 동안 얼마나 많은 말을 하며 사는지 생각하면 자못 숙연지기조차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들이 세상에 와서 한 말들은 아무리 하찮은 말이라 할지라도 사라지지 않고 이 세상 어딘가에 한 마디 한 마디 그대로 쟁여 있을 것이라고.

억울한 말, 기막힌 말, 비꼬는 말, 거짓말, 칭찬의 말, 용기를 주는 말, 믿는 말...어린이가 맨드라미에 앉은 호랑나비를 보고 "민들레야, 호랑나비를 꼭 물고 있어줘, 내가 잡을 테니." 라고 한 해맑은 그 어린이의 말조차도 그 말은 이 세상에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시 질문해본다. 대체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사는 것일까. 몇 사발의 말, 몇 트럭분의 말을 하는 것일까. 모르긴 해도 절간의 스님들은 말을 참 적게 하고 살 것 같다. 면벽 생활을 하면서 묵언으로 진리를 깨치는 스님들은 오리려 되도록이면 말을 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리라. 그런가 하면 정치인들은 너무나 많은 말을 하고 사는 것 같다. 우스갯말로 강도 없는데 다리를 놓아주겠다는 허튼 말을 하고 사는 사람이 정치인이라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말을 많이 하는 순서대로 가려낸다면 정치인이 으뜸일지도 모른다. 저자에 사는 서민들은 어떨까. 그날 그날 먹고 살기 위해 역시 수많은 말을 하고 살 것이다.

많은 말을 한다고 해서 꼭 흉잡힐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 말이 진실인가, 아닌가. 남을 배려하고, 격려하고, 칭찬하는 말이라면 많은들 어떠랴.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하루하루 참으로 많은 허위와 비난과 자기 주장만을 하는 말을 마구 쏟아내며 산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하루를 되새기며 후회한다. 아, 그때 그냥 가만히 참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말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을 것을.

우리가 세상에 와서 한 말들이 한 마디도 사라지지 않고 이 세상 어딘가에 남아 있다면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는 각자 자기가 한 말들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나는 또 동화 같은 생각을 해본다. 그 말 더미를 뒤지며 세상에서 내가 한 많은 말들 속에 보석처럼 빛나는 참말이 있는지 찾아보게 될 것이라고. 그런데 내가 한 말들이 온통 말의 껍질들뿐이라면 그보다 더 슬픈 일이 있을까. 요즘들어 우리 사회는 사람들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독을 내뱉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누구나 멋대로 접할 수 있는 인터넷이 발달해서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남을 비난하기 전에, 거짓말을 하기 전에, 남도 나처럼 사랑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나는 오직 진실된 말들만을 골라서 하게 되지 않을까. 인터넷을 도배하는 욕들, 믿을 수 없는 광고문구들, 그저 돈을 싸들고 오라는 거리의 휘황찬란한 간판들, 자기만 옳다는 정파들, 대체 서로를 감싸주는 사랑의 말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겠다. 이런 말의 혼을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팍팍하기만 하다. 성경이 기록한 바대로 말이 사람이 되었다면 우리는 모두 말의 혼을 가진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해본 몽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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